동남아 오픈마켓 플랫폼 쇼피를 통해 해외 진출한 K뷰티 기업 A사. 하지만 그레이마켓(비공식 셀러)에서 공식몰보다 30% 낮은 가격에 덤핑 판매가 벌어져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그레이마켓 제품을 마치 공식 판매 제품인 것처럼 홍보하는 인공지능(AI)발 온라인 마케팅 물량까지 쏟아졌다. 마진 확보가 어려워진 현지 오프라인 파트너들은 연이어 이탈했다. A사는 글로벌 가격 주도권을 완전히 잃고 1년 만에 현지 시장에서 철수해야 했다.
AI 기술이 고도화하면서 K브랜드 가품과 비공식 판매 물량이 급증하고 있다. 9일 브랜드 보호 전문 기업 마크비전이 패션·뷰티·명품 등 국내 주요 소비재 기업 실무자와 의사결정자 400명을 설문한 결과 10명 중 8명(82.1%)은 AI 기반 온라인 위협을 최소 한 가지 이상 경험했다고 답했다.
이전 K브랜드 가품은 주로 제품 자체를 베끼는 것이었다. 요즘 가품은 이미지와 광고, 후기, 고객 응대까지 갖춘 ‘가짜 브랜드몰’로 진화했다. 기업 관계자들이 겪은 가장 흔한 위협 유형은 공식 제품의 가격·이미지를 변형해 모니터링을 피하는 비공식 판매자(경험률 30.5%)였다. AI 이미지를 활용한 위조상품 대량 등록(25.8%), AI로 만든 브랜드 사칭 SNS 계정(24.8%), 딥페이크 불법 광고(21.5%)도 많았다. 마크비전 관계자는 “최근엔 제품 모방을 넘어 비공식 셀러들이 AI로 가격 체계를 무너뜨리는 유통망 교란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과거 위조업자가 정품 사진을 그대로 도용했다면, 이제는 AI로 제품 배경과 모델, 상품 설명을 바꿔 단속망을 피한다. 같은 선크림도 미국 플랫폼에선 ‘코리안 바이럴 선크림‘, 동남아에선 ‘K뷰티 화이트 글로우 크림’으로 등록하는 식이다. 상세페이지에는 AI가 쓴 후기와 별점, 가짜 전문가 추천 문구가 붙는다. AI 피부 전문가를 앞세운 SNS 광고를 만들기까지 한다. 짝퉁 생산라인이 공장에서 AI 프롬프트로 옮겨간 셈이다.
월드트레이드마크리뷰에 따르면 과거 전통적 위조업자는 하루 100개 수준의 가짜 상품 등록글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은 플랫폼과 언어, 가격 전략 별로 맞춤화된 상품 설명을 하루 1만개 등록할 수 있다. 어떤 스타일이 더 잘 먹히는지 A/B 테스트까지 가능하다. 챗GPT 등 AI 서비스가 가품이나 비공식 셀러를 정품으로 오인해 추천하는 현상도 벌어지고 있다. 악의적 판매자들이 AI를 활용해 가짜 리뷰와 조작글을 대량으로 쏟아내면서다.
AI 위협은 실제 브랜드 매출 타격으로 이어지고 있다. 마크비전 설문에서 응답자의 81%가 온라인 위협으로 인한 실제 매출 손실을 경험했다. 연 매출의 5%가 넘는 손실을 체감한 기업이 33.2%에 달했다. 73.5%는 AI 문제가 사업에 장기적으로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부 발빠른 기업들은 선제적인 조치에 나서고 있다. 연세유업은 과거 비공식 셀러들의 무분별한 유통으로 쿠팡 등 핵심 유통 채널과의 납품가 인상 협상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비공식 유통 모니터링 시스템을 구축하면서 그레이마켓 유통량을 40~60% 줄여 온라인 최저가를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K뷰티 브랜드 바이오던스도 글로벌 판매 채널이 늘면서 위조 상품 문제를 겪다가 위조 탐지 솔루션을 도입했다. 패션기업 F&F는 9개국 유통 채널을 자동 모니터링하는 체계를 구축해 월 2만 건 이상의 문제 상품을 탐지하고 있다.
다만 아직 대다수는 AI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마크비전 설문에서 온라인 위협이 2년 전보다 증가했다는 응답은 56%였지만, AI 위협 전담 조직과 예산을 모두 운영하는 기업은 8.0%에 그쳤다. AI 검색·추천 서비스에서 자사 브랜드와 제품이 어떻게 노출되는지 전담 인력·시스템으로 정기 측정하는 기업은 14.2%에 불과했다. 업계 관계자는 "K브랜드 입장에선 단순 IP 침해가 아니라 공식몰 가격 붕괴, 현지 총판 이탈, AI 검색 결과 왜곡, 소비자 신뢰 하락으로 이어지는 경영 리스크"라며 "대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고은이 기자 kok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