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스트 김용범, 정책실장 김용범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6-07-09 06:00
수정 2026-07-09 09:35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이코노미스트다. 본인도 자신의 정체성을 그렇게 정의해왔다. 평생을 거시경제 분석과 정책 현장에서 보낸 그의 경력이 말해준다. 그가 청와대에 들어간 이후 처음으로 공개 강연을 했다. 8일 서울 반얀트리호텔에서 열린 한경 밀레니엄 포럼에서다.

그는 이날 강연을 “저를 알던 사람들이 ‘김용범이 달라졌어’라는 얘기를 한다”는 말로 시작했다. 그는 지난 5월 ‘국민배당금’ 발언으로 시장에 충격을 줬다. 강단 경제학자의 문제 제기였다면 토론거리에 그쳤겠지만 정책실장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정책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가 된 것이다. 위기대응의 경험이 누구보다 많은 그에게 지금 한국 경제가 직면한 상황은 무엇을 요구하고 있을까.

이코노미스트 김용범은 적극재정론자다. 정책실장 위치에서도 그 포지션은 달라지지 않았다. 대신 단서는 달라졌다. AI 초과세수(최근에 공식용어가 추가세수로 바뀌었다)를 둘러싼 정책적, 정치적 논쟁과 함께 더 큰 담론이 제기되고 있다. ◆낯선 숫자의 등장- 국민총소득 증가율 9.2%이날 그의 강연 제목은 ‘낯선 풍경’이었다. 대한민국 경제가 과거와 다른, 설명할 수 없는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제대로 해석할 수 없는 이코노미스트로서 깊은 당혹감을 느낀다고 했다. 그는 1년 전 한국경제를 지배했던 담론을 먼저 소환했다. “L자형 한국경제, 차갑게 식어버린 성장 엔진”, “저성장과 상시적 위기 앞에 희미해진 미래의 희망”. 이렇다 할 대내외 충격도 없이 4개 분기 연속 0%대 성장이 이어지고, 소매판매지수는 1995년 통계 작성 이후 처음으로 13개 분기 연속 감소한 시기다. 피크코리아, 수축 사회라는 담론도 쏟아졌다.

그런데 지금 마주한 숫자는 전혀 다르다. 올해 실질 국민총소득(GNI)은 통계 작성 이후 최대치인 9.2% 증가가 확실시되고 있다. 올해 경상수지 흑자는 3000억달러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의 표현대로 “1960년 통계 작성 이래 처음 겪는” 역대급 호황이다. 명목 GDP 증가율은 10.5%로 1976년 이후 50년 만에 가장 높다.

숫자의 ‘질’도 달라졌다. 그는 “이번에는 다르다. 한국 경제가 체격(외형)뿐만 아니라 체력(구매력)까지 압도적으로 성장했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고성장률은 국내의 고물가가 실질을 갉아먹는 착시였다면 지금은 해외에서 벌어들인 ‘진짜 돈’이 유입되는 실질적인 성장이라는 설명이다. ◆환희가 만든 역설 “너무 강해서 약한 원화”그러나 시장의 지표는 기묘할 정도로 엇박자를 낸다. 달러가 이토록 풍부한데 환율은 1500원 선을 오르내리고, 고물가·고금리의 압박은 요지부동이다. 그는 “너무 강해서 약한 원화”라고 표현했다. 교과서대로라면 원화 절대 강세가 이어져 여타 부문의 경쟁력 상실을 걱정하는 ‘네덜란드병’이 정상적인 정책 부처의 고민이어야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그는 이를 “코스피 폭등의 역설, 그러나 안정적인 달러 유동성”이라고 표현했다. “한국 주식 시장의 성공이 만들어 낸 차익실현과 리밸런싱 결과”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5월 한 달 경상수지는 386억1000만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는데, 같은 달 외국인의 국내주식 순매도 역시 310억5000만달러로 역대 최대였다. 무역의 파도와 자본의 파도가 같은 달 정반대 방향으로 동시에 사상 최고치를 찍은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너무 강해서 약한 원화, 너무 잘나가서 생긴 문제”라며 “한국형 거시경제 완충장치”라고 설명했다.

그가 우려하는 균열은 환율이 아니라 양극화다. “소득, 자산, 산업지역 간 복합 양극화로 전개되는 K자형 성장”이다. 그는 “평균은 좋아지는데, 중간이 흔들리는 불편한 현실”이라며 “호황의 과실은 위로, 긴축의 고통은 아래로 향할 때 경제 문제는 정치 문제로 전환된다”고 경고했다.

◆경제학의 ‘파산’-거시모델이 멈추는 지점철저하게 거시경제학자로 훈련된 그의 눈에 지금의 국면은 ‘기존 경제학 모델의 파산 상태’와 다름없다. “어떤 이코노미스트도, 어떤 모델로도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솔로우(Solow) 모델을 비롯한 전통적인 생산함수와 국내총생산(GDP) 측정 방식은 너무 늦다는 것이다.

그는 이를 “AI 혁명이 시간 자체를 단축시키고 압축하는 현상”이라고 진단한 뒤 “기존 경제학의 낡은 메저먼트(측정 도구)로는 잡아낼 수 없다. 지금 일어나는 혁명적 상황을 반영하는 유일한 근사치는 ‘기업 이익’뿐이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내가 가진 경제학적 이론 틀은 불비(不備)하다. 지금 현상을 설명하는 모델은 없다”고 고백했다. 이코노미스트로서 그가 마주한 거시적 당혹감의 실체다.

그렇다고 그는 이 호황을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하지도 않는다. 그는 이번 호황의 성격을 “사이클인가 구조 전환인가”라는 질문으로 던지며 “한 세대, 어쩌면 한 세기 만에 찾아오는 대한민국 경제의 좌표가 다시 그려지는 순간”이라고 해석했다.

동시에 그는 586세대가 한때 금과옥조로 삼았던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는 마르크스의 경제결정론 명제를 빌려와 지금의 시대를 규정했다. “현재 시대의 절대적인 하부구조는 반도체와 AI”라는 설명이다. 이어 “이 하부구조를 모르면 미래를 모르는 것이다. AI 시대에 먹고사는 문제의 답은 결국 반도체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흐름은 비가역적”이라고 단언했다. ◆경제정책의 새 문법- 기업가형 국가 모델그렇다면 경제학 이론이 불비한 상황에서 ‘정책실장 김용범’의 선택은 무엇이어야 할까. 그는 새로운 경제 정책의 ‘문법’을 쓰기로 한 듯하다. 순환적 호황인지, 구조적 전환인지 확신할 수 없고, 기존 거시 모델로도 설명이 안 되지만 기다릴 수만은 없다. 불완전하지만 결정은 해야 한다.

그 대안이 반도체다. 반도체 호황을 통해 벌어들이는 막대한 이익이 시차를 두고 시장에 풀릴 때 물가와 부동산에 미칠 영향은 지금보다 훨씬 파괴적일 것이라는 사실은 명확하다. 막대한 초과 유동성이 과거의 타성대로 수도권의 특정 부동산 시장으로만 쏠린다면, 머지않아 파국적 임계점이 온다는 것이 그의 경고다. 그는 이를 “축복이 될 수도, 재앙이 될 수도 있는 반도체 특별호황이 만들어낼 막대한 부(富)”라고 정의했다.

대규모 메가 프로젝트와 호남반도체 클러스터를 잇는 ‘기업형 첨단도시’ 구상은 이 유동성 압력을 거시경제적으로 분산시키기 위한 대응이다. 단순한 지역균형발전론을 넘어 자칫 시장을 과열시킬 위험한 유동성의 산소가 지방으로 흘러가도록 하는 정책적 선택이다.

김 실장은 이 지점에서 마리아나 마추카토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교수가 주장한 ‘기업가형 국가’ 모델을 끌어왔다. 국가는 단순히 시장 실패를 보정하는 존재가 아니라, 위험을 함께 지고 시장을 창출하는 존재라는 게 핵심 논지다. 막대한 비용이 수반되는 장기·고위험 투자는 민간이 감당하기 어렵다. 국가는 방향을 제시하고 동시에 초기 위험을 떠안아야 한다.

메가프로젝트도 마찬가지다. 팹, 전력, 용수, 송전망, 지방 첨단도시, 인재 양성은 민간기업이 해결할 수 없다. 기업의 투자 결정을 지휘하는 국가가 아니라, 민간이 더 크게 투자할 수 있도록 병목을 제거하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닥치고 팹…원전은 지역이 원하면 다 지어야”다행히 대한민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라는 글로벌 메모리와 HBM의 ‘원투펀치’를 보유하고 있다. 그는 이를 “기적 같은 일”이라고 했다. 이 관점에서 두 회사는 단순한 상장기업이 아니다. 주주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민간기업인 동시에 지정학적 ‘국가 전략자산’이다.

그러나 그 우위가 영원할 수는 없다. 지금 글로벌 무대에서는 미국 마이크론이 미국 내 제조 역량을 갖추기 위해 공격적으로 팹을 짓고 있고, 중국 창신메모리(CXMT)가 무섭게 추격하며, 일본이 권토중래를 노리는 무한 ‘팹 레이스(Fab Race·공장 증설 경쟁)’가 벌어지고 있다. 뒤처지면 국가 전체가 큰 불행에 빠진다. 그렇기에 민간의 반도체 경기 다운턴 우려와 달리 국가 입장에서는 “닥치고 팹을 지어야 하는” 냉혹한 현실이다.

반도체의 병목은 용수와 전기다. 특히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안정적 전력 없이는 가동될 수 없다. 전력은 돈이 생긴다고 바로 만들 수 있는 자원이 아니다. 원전, LNG, 재생에너지, 송전망, 용수 인프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김 실장이 전기를 악몽처럼 따라오는 문제로 표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수요가 확인된 뒤 대응하면 늦다. 전력망은 선제 투자로만 확보된다. 그는 “신규 원전도 지역이 원한다면 다 지어야 한다”고 말했다. ◆생산국가로의 전환 시도김용범 실장의 ‘낯선 풍경’은 경기낙관론도, 새로운 산업정책론도 아니다. 그것은 측정 불능의 국면에서 정책을 선택해야 하는 딜레마와 같다. 메가프로젝트가 모두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AI 혁명이 지금 기대만큼 빠르게 확산하지 않을 수도 있고, 반도체 사이클이 예상보다 크게 꺾일 수도 있다. 지역별 나눠먹기 혹은 정치적 배분으로 변질할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그럼에도 그가 던진 화두는 피할 수 없다. 한국 경제는 익숙한 저성장에서 벗어나는 듯하지만, 지금의 슈퍼 호황이 지속 가능한 것은 아니다. 결국 질문은 하나다. 반도체와 AI가 만들어낸 초과이익과 유동성을 어디로 보낼 것인가. 수도권과 부동산으로 가면 호황은 격차가 된다. 단기 세출로 흩어지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팹, 전기, 용수, 청년, 지방, 장기자본으로 흐르면 호황은 생산능력으로 전환된다. 메가프로젝트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선택이자 해답이다.

“과거 문법으로는 새로운 현상을 설명할 수 없다. 다만 치명적인 오판이나 실기(失期)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김 실장의 강연 마무리 발언이었다. 초과 세수를 활용해 과감하게 판을 깔고 리스크를 짊어지는 ‘기업가 국가’로 변모하겠다는 정책적 선택의 결과가 어떤 모습으로 결론날지 주목된다.

이심기 수석논설위원 s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