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의 눈물' 부르고뉴…자본주의 속 건져 올린 가장 인간적 위로 [김태형의 와인 B-side]

입력 2026-07-13 10:28
수정 2026-07-13 10:45

오늘날 부르고뉴(Bourgogne)라는 명칭은 와인 업계에서 자본주의 시장이 빚어낸 가장 완벽한 베블런 재(Veblen good), 즉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재화로 통한다. 전 세계 거대 자본이 이 좁은 구역의 포도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이고, 라벨에 새겨진 생산자의 이름 하나에 수천만 원의 호가가 책정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다. 부르고뉴 와인은 이제 미학적 음미의 대상을 넘어 자산의 포트폴리오로 기능한다.

와인 애호가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이름인 부르고뉴지만 필자에게 사뭇 다르게 읽힌다. 주머니가 가볍던 유학생 시절, 구매할 수 있는 와인이라곤 마트 매대의 최하단에 놓여 있던 2~3유로짜리 보르도 레드들뿐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저가 와인들 사이에서 이름 모를 콩쿠르의 수상 라벨이 붙은 병을 찾아내는 것이 당시 내가 부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였다.

그러다 귀한 손님이 방문하는 날이면 비장한 각오로 예산을 10유로 선으로 끌어올렸다. 그제서야 비로소 부르고뉴라는 거대한 신화의 문턱에 가장 초라한 입장권을 밀어 넣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미한 예산으로 손에 쥘 수 있는 부르고뉴는 거대 네고시앙1)의 레지오날(Regionale) 급2) 와인이거나 위대한 빈티지에서 완전히 비껴간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두어 번 접하다 보면 라벨에 적힌 글귀도 읽어보게 되고, 이것이 어떤 품종으로 만들어지는지, 또 직업적인 관점에서는 어떠한 향기를 내는지에 대해서도 더듬거리게 된다. 언젠가부터 손님에게 잔을 건네며 '이것이 프랑스 와인의 정수'라고 귀띔하면서 이 부르고뉴 와인을 스스로 흠모하는 것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어떤 대상을 아주 오랫동안 동경해 오면,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중요한 행보를 이끄는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2022년 겨울, 햇수로 4년 만에 다시 프랑스를 찾았을 때 이번이 마지막 방문일지도 모른다는 각오가 자리 잡고 있었다. 비록 그 이후로도 매년 프랑스를 다시 찾게 되는 기묘한 인연이 이어졌지만, 그 여정은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온 버킷리스트를 지워나가는 의식에 가까웠다.

그렇게 머리로만 그리던 부르고뉴의 진면모를 이제는 시각과 후각을 통해 직접 확인하겠다는 다짐 하나로 상뜨네(Santenay) 마을로 향했다. 부르고뉴의 지도를 펼쳤을 때, 대중의 시선은 대개 본(Beaune)이나 쥬브레 샹베르탱(Gevrey-Chambertin), 본 로마네(Vosne-Romanee) 같은 화려한 이름들에 사로잡히기 마련이다. 그에 반해 부르고뉴 와인 산지 최남단에 위치한 상뜨네는 다소 소박한 변두리로 여겨지곤 한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부르고뉴 와인 시장에서 택할 수 있는 숨은 대안이기도 하지만, 이곳의 역사를 파고든 이들에게 이 마을은 피노 누아(Pinot Noir)라는 신화의 원형을 품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더 깊다. 현재 우리가 아는 단일 품종 테루아의 부르고뉴를 탄생시킨 역사적 결단이 바로 이곳에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1395년, 부르고뉴의 통치자였던 필립 르 아르디(Philippe le Hardi) 공작은 상뜨네에서 와인의 역사를 바꿔놓은 칙령을 발표한다. 당시 포도밭을 점령하고 있던 가메(Gamay)는 키우기 쉽고 수확량이 압도적이라 흑사병과 백년전쟁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생계를 지탱해 주던 고마운 품종이었다. 그러나 공작은 가메를 매우 유해하고 불충한 품종인 가메(Tres mauvais et tres deloyal plant, nomme Gamay)를 부르고뉴 영지 내에서 전부 뽑아내라 명했다. 이로 인해 부르고뉴에서는 가메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를 피노 누아가 독점하게 되었다.

자기가 뿌리 내린 테루아를 온전히 투사하고 수십 년간 생명력을 유지하며 복합미를 발현하는 피노 누아의 잠재력을 알아본 것이다. 이처럼 피노 누아 단일 품종이라는 부르고뉴 와인의 기틀이 시작된 곳이자 상뜨네 마을의 상징인 ‘도멘 드 필립 르 아르디(Domaine de Philippe le Hardi)’가 이번 여정의 진정한 목적지였다.

그러나 일정을 준비하던 와중에 예기치 못한 변수를 맞닥뜨렸다. 아뿔싸,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연휴 기간이었던 것이다. 도멘 드 필립 르 아르디가 문을 닫는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빠르게 대안을 찾아야 했다. 그때 뇌리를 스친 것은 니콜라 롤랭(Nicolas Rolin) 재상과 호스피스 드 본(Hospices de Beaune)이었다.

15세기 부르고뉴 공국의 재상이었던 니콜라 롤랭은 필립 르 아르디 공작만큼이나 이 지역 와인에 독보적인 영혼을 불어넣은 인물이다. 그는 백년전쟁의 참화 속에서 부르고뉴 공국을 유럽 최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은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러나 롤랭이 역사에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은 정적을 숙청하거나 성벽을 쌓은 것이 아니었다. 1443년, 그는 아내 기공 드 살랭(Guigone de Salins)과 함께 본 시내에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아무런 대가 없이 치료해 줄 자선 병원인 호스피스 드 본을 설립했다. 이는 병란(兵亂)으로 고통받는 빈민들의 참상을 목격한 후 내린 용단이었다. 당시의 병원은 단순히 몸을 고치는 곳이 아니라, 죽음의 공포 앞에 선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성소였다.


중요한 것은 이 거대한 자선 병원을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재원이었다. 니콜라 롤랭과 그의 뜻에 동참한 부르고뉴의 귀족들은 병원에 돈 대신 자신들이 가진 가장 가치 있는 자산, 즉 포도밭들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병원은 이 밭에서 정성스럽게 와인을 빚어 판매했고, 그 수익금은 운영과 빈민 구제에 사용됐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매년 11월 셋째 주 일요일에 열리는 세계 최고(最古)의 자선 와인 경매, 호스피스 드 본의 시초다.

그리고 니콜라 롤랭이 소유했던 성터 위에 세워진 ‘샤또 드 라 크레(Chateau de la Cree)’가 그의 헤리티지를 이어오고 있다. 물론 도멘 드 필립 르 아르디에 방문할 수 없게 된 것은 뼈아팠지만, 샤또 드 라 크레가 급하게 문의한 방문 일정에 화답해 준 덕에 나의 프랑스 행이 유효할 수 있었다.

마침내 도착한 상뜨네에서 마주한 풍경은 지극히 한량한 프랑스 시골의 모습이었다. 마을 한편에 예약해 둔 민박집을 찾아 마당에 차를 세웠다. 방에 짐을 넣자마자 발길은 자석에 이끌리듯 이번 여정의 진정한 목적지였던 도멘 드 필립 르 아르디로 향했다. 성으로 향하는 곧은 길을 제쳐두고 일부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포도밭 쪽으로 우회하여 빙 둘러 걷기 시작했다.

12월의 포도나무에는 그 어떤 열매도, 푸른 잎사귀도 남아있지 않았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나무들이었지만, 그 줄기를 지탱하고 있는 흙을 바라보고 있자면 대지 깊은 곳에서 겨울의 동결을 견디며 웅크리고 있는 테루아 고유의 강인한 생명력이 전달되어 왔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니 도멘 드 필립 르 아르디가 위치한 상뜨네 성 담장에 도착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돌담과 그 너머로 어렴풋이 고개를 내민 부르고뉴식 지붕 양식의 샤또가 눈에 들어왔다. 돌담이 끝나고 마주한 철문은 역시나 굳게 닫혀 있었고 사방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나는 허탈해하는 대신 철문 창살 사이로 손을 푹 밀어 넣었다. 그리고 끝내 발 들이지 못한, 그러나 600년 전 필립 공작의 숨결이 여전히 서려 있을 그 공간의 공기를 한움큼 움켜쥐어 냈다. 비록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지만, 그 손짓만으로도 오랜 동경의 한 페이지가 나름의 방식으로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아쉬움을 거두고 발걸음을 돌려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행히 니콜라 롤랭의 숨결을 이어받은 샤또 드 라 크레(Chateau de la Cree)는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라 크레의 웅장한 돌문을 지나자 양옆으로 펼쳐진 포도밭 사이로 정갈한 오솔길이 뻗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우뚝 서 있는 길쭉한 사이프러스 나무들은 마치 먼 곳에서 온 이방인을 환영하며 도열해 있는 장병들처럼 나를 안내했다.

코랄색 벽면 위로 회색빛 지붕을 정갈하게 올린 현재의 세련된 본관은 19세기에 지어진 것이었지만, 바로 그 아래로 롤랭 재상 시절부터 그 명맥을 단 한 번도 끊지 않고 유지해 온 고색창연한 지하 카브(Cave)가 숨을 쉬고 있었다. 로비에 들어서 사방에 전시되어 있는 샤또 드 라 크레의 오래된 와인병들을 눈으로 좇고 있으니, 그제서야 내가 부르고뉴의 심장부에 진정으로 발을 디뎠구나 하는 실감이 온몸으로 밀려들었다.


한 시간 남짓의 투어를 통해 샤또의 구석구석과 지하 카브를 유람하며 부르고뉴 와인과 이 와이너리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오랫동안 이미지와 텍스트로만 읽으며 머릿속으로 아스라이 그리던 지식들이 석조 벽면의 질감과 서늘한 공기를 통해 생생하게 스며드는 기분이었다. 투어의 종착지는 기다리던 테이스팅 타임이었다. 정갈하게 세팅된 테이블 위로 여러 와인들이 차례로 잔에 채워졌다. 하지만 샤또의 문을 나설 때, 손에는 가장 아름다웠던 단 하나의 와인이 들려 있었다. 샤또 드 라 크레 상뜨네 프르미에 크뤼 '그라비에르' 루주(Chateau de la Cree Santenay Premier Cru 'Gravieres' Rouge) 2019.

2019년의 부르고뉴는 유독 뜨겁고 건조했던, 이른바 태양의 해였다. 대지를 집어삼킬 듯한 열기가 포도나무 머리 위로 쏟아졌고, 과실은 농축된 당미와 짙은 아로마를 품게 되었다. 하지만 샤또 드 라 크레가 소유한 1등급 포도밭(1er Cru)인 '레 그라비에르'에서는 낮 동안 굵은 자갈들이 뜨거운 열기를 반사해 내는 사이 포도나무 뿌리가 지하 깊숙한 석회암반을 향해 필사적으로 파고들었다. 극단적인 태양의 열기와 토양의 냉기가 포도 나무 안에서 격렬하게 충돌하며 화려함과 무게감이 공존하는 2019년 빈티지 특유의 구조를 완성한 것이다.


잔을 흔들면 잘 익은 야생 베리와 블랙커런트의 탐스러운 향이 피어오르지만, 그 이면에는 비오는 날의 흙내음과 보랏빛 제비꽃의 향기가 내려앉는다. 입안에 머금었을 때도 첫 감각은 뜨거운 햇살이 빚어낸 볼륨감이지만, 곧이어 촘촘한 타닌과 함께 드러나는 묵직한 가죽과 마른 담뱃잎의 향기가 이 와인의 본질이 결코 가볍지 않음을 증명한다. 품에 안은 병을 소중히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날, 가장 축복해야 할 순간에 이 와인을 꺼내어 마시겠노라고. 그렇게 나는 긴 프랑스 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물해가던 상뜨네의 기억을 붙잡고 이 와인을 언제 오픈할지 고심하던 차, 평온하던 일상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며 마치 친형 같이 나를 돌봐주던 존재인 O가 있다. 그는 누구보다 단단하고 강건해 보이던 사람이었다. 늦깎이 결혼 후 천사 같은 아이가 찾아왔다는 소식은 모두에게 거대한 축복이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산모와 아기 모두가 극심한 조산 위험에 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이는 간신히 세상의 빛을 보았지만, 스스로 숨을 쉬기조차 버거워 인큐베이터 안에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그 강인하던 이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고, 그가 보내오는 문자 한 통,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 한 마디에 절망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던 와중, O의 박사 졸업식이 열렸다. 본래라면 성취와 축하로 가득해야 할 교정이었지만, 식장에서 마주한 우리의 눈빛에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교차했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무언의 포옹 속에 흐르던 침묵은 그 어떤 말보다 깊은 위로이자, 이 모진 계절을 기어이 버텨내 달라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헤어질 무렵, 나는 가방 깊숙이 소중히 품어왔던 와인병을 꺼내 그에게 안겨주었다. 프랑스 상뜨네에서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 마시겠다고 다짐하며 아껴두었던 바로 그 와인이었다. 나의 손을 떠나는 차가운 유리병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깊은 기도를 올렸다. 숭고한 영혼이 서린 상뜨네의 대지가, 그 생명력이 O의 무너진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시장의 높은 가격표나 거창한 수식어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는 순간이 있다. 1443년 니콜라 롤랭이 병든 이들을 위해 포도밭을 바쳤던 호스피스 드 본의 역사가 활자가 아닌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상뜨네의 와인을 그의 손에 쥐어준 것은 대단한 결심이 아니었다. 그저 내가 건넬 수 있는 가장 정성스러운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와인이 가진 진짜 가치는 화려한 라벨이 아니라, 이토록 필요한 순간에 누군가를 위해 건네는 진심에 있을지도 모른다.
[김태형의 와인셀러]

와인명: 샤또 드 라 크레 상뜨네 프르미에 크뤼 '레 그라비에르' 루주 2019

아로마 노트: 잔을 채운 직후부터 산딸기와 크랜베리의 청량한 붉은 과실 향을 뿜어내고, 입 안에서는 자갈밭 테루아를 대변하는 미네랄리티가 직관적으로 전달된다. 공기와의 접촉이 길어질수록 제비꽃의 우아한 플로럴 뉘앙스가 짙어지며 입체적인 골격을 이룬다. 비에 젖은 점토와 낙엽, 그리고 잘 길든 가죽과 마른 담뱃잎의 잔향이 긴 여운을 남기며 가라앉는다.

추천 마리아주: 훌륭한 구조감과 복합미로 와인 자체로 즐기기에도 손색이 없다. 촘촘하게 짜인 타닌과 팽팽한 산미는 오리고기의 풍부한 지방과 만날 때 부드럽게 어우러질 듯하다. 한편으로는 버섯 요리로 흙내음의 감칠맛을 증폭시키거나, 향신료를 가미한 간장 베이스의 갈비 조림과 매칭하여 한식 고유의 밀도감과 교감시킬 수도 있겠다.

구매 팁: 본문에 소개된 샤또 드 라 크레는 현재 국내 미수입 품목이다. 만약 당신의 셀러에 당장 상뜨네의 향기를 채워 넣고 싶다면 ‘도멘 뱅상 지라르댕 상뜨네 프르미에 크뤼 레 그라비에르(Domaine Vincent Girardin Santenay 1er Cru Les Gravieres)'가 훌륭한 대안이 될 것이다.1) 네고시앙 : 포도나 와인을 매입해 양조·병입하는 생산자
2) 레지오날(Regionale) 급 : 지역 전역의 포도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광역 등급 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