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산업, 이기주의로는 지킬 수 없다한국 경제에서 반도체 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입니다. 수출과 설비투자, 고용, 세수는 물론 자본시장의 향방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산업의 흔들림은 곧 한국 경제 전체의 변동성 확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도 최근 반도체 투자를 둘러싼 논의는 산업 전략이 아니라 지역 배분 문제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특정 지역에 공장을 유치하려는 시도가 정치적 이해관계와 결합하면서, 산업의 본질적 경쟁력보다 ‘어디에 지을 것인가’라는 소모적 논쟁이 중심이 되고 있습니다. 이는 매우 위험한 접근입니다. 중국에 대한 대응이 시급하다지금 더 시급한 과제는 내부의 지역 논쟁이 아니라, 급속히 추격해 오는 중국 반도체 산업에 대한 냉정한 분석과 대응입니다. 중국은 막대한 자본과 국가 주도형 산업정책, 거대한 내수 기반을 결합해 기술 개발 속도를 가속화하고 있습니다.
중국은 한국을 턱밑까지 추격한 수준을 넘어, 일부 분야에서는 이미 추월 단계로 진입했습니다. 중국에 반도체는 공산당의 명운이 걸린 첨단산업의 핵심입니다. 중국 창신메모리(CXMT)는 도광양회전략으로 글로벌 D램시장에서 점유율 8%를 기록하며 글로벌 4위로 올라섰습니다. 패러다임의 전환이 시급이제는 반도체를 바라보는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해야 합니다. 반도체는 단순한 제조업이나 일자리 창출 수단이 아니라, 전투기·미사일·전차와 같은 국가 안보 자산입니다.
한국이 한정된 자원을 놓고 내부 정쟁에 몰두하는 사이, 중국은 거대한 자본으로 산업 생태계 전체를 장악하려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파이를 나누는 싸움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파이를 지키고 확대하는 전략이 시급합니다.
이를 위해 정부의 역할은 결정적입니다. 토지 확보와 도로, 전력망, 용수 시스템, 폐수처리, 물류 동선, 인허가, 임직원 자녀의 교육 인프라, 협력사 기업들이 즉시 가동에 들어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민간 기업은 기술과 수율에 집중하고, 국가는 인프라를 구축하고 제도적 병목을 제거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컨트롤 타워 조직으로 연속성 보장중국이 5개년 계획을 통해 일관된 산업 전략을 추진하는 것과 달리, 한국은 정책 연속성이 취약합니다. 정권 교체와 무관하게 장기적 정책을 개발하고 유지하는 권한을 지닌 강력한 콘트롤타워가 필요합니다.
반도체처럼 투자 회수 기간이 길고 설비 전환 비용이 많이 들며, 인력 축적이 핵심인 산업에서는 정책의 흔들림 자체가 치명적인 위험입니다. 한국에 당장 필요한 것은 단순한 생산 규모 확대가 아니라 공정 미세화, 패키징 고도화, 전력 효율, AI 연산 최적화까지 아우르는 기술의 확장과 시스템의 구축입니다.
중국 기업이 미국의 제재 속에서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중국은 약 200조원 규모의 국가 반도체 빅펀드를 통해 기업의 생산 능력을 단기간에 고도화했습니다.
산업의 뿌리는 사람이며, 기술 경쟁력은 인재에서 시작됩니다. 장비는 돈으로 살 수 있지만, 반도체는 설계, 공정, 장비, 소재, 그리고 고도의 전문 인력이 한데 모여 시너지를 내야 하는 '클러스터형 산업'입니다. 인프라와 인력 확보가 어려운 지역에 선심성으로 공장을 분산 배치하면 산업 경쟁력 자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중복주문'의 함정을 경계해야반도체 호황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회사의 시가총액 합산 비중이 코스피 전체의 절반 수준을 넘나들면서 많은 사람은 주가 상승에 취해 있습니다. 그러나 주가가 오르고 코스피 비중이 높아졌다는 점에 환호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험 신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분야든 가격이 폭등할 때 수요자는 실제 수요를 초과해 '중복 주문'을 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현재의 반도체 수요가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착시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입니다.
중국 정부가 나서서 반도체산업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가운데, 우리도 천문학적인 규모의 신규 투자를 한다는 것은 'AI 투자 사이클'의 정점에 도달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점을 의심해봐야 합니다. 정부의 압박이 재앙이 될 수도정부가 기업을 압박해 합리적이지 않은 지역에 반도체 공장을 세우도록 하는 것은 엄청난 재앙이 될 가능성이 큰 선택입니다. 입지 결정은 정치적 균형 논리가 아니라, 온전히 제조사의 전략적 의사결정에 맡겨야 합니다.
글로벌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싸우는 전쟁터에서 국내 정치적 논리로 자원을 분산시키는 것은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는 것과 같습니다. 반도체는 한국이 세계 시장에서 확보한 거의 유일한 초격차 산업이며, 동시에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핵심 기반입니다.
지역 균형 발전은 반도체가 벌어들인 재원으로 다른 산업이나 인프라를 확충해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 반도체 산업 자체를 볼모로 삼아 하향 평준화해서는 안 됩니다.
정부는 반도체를 명확히 ‘국가 안보 산업’으로 규정하고, 정치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스마트한 인프라 투자, 정책의 일관성, 전문 인재 양성 등 규모가 아니라 질적인 기술 고도화 투자만이 한국 반도체 산업을 지키는 길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경닷컴 The Moneyist> 조평규 경영학박사 /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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