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스타트업은 대개 비슷한 장면에서 출발한다. 사람은 부족하고 해야 할 일은 끝이 없다. 제품도 만들어야 하고, 고객도 만나야 하고, 투자자도 설득해야 하고, 마케팅도 해야 한다. 회의실에서는 매일 새 아이디어가 나온다. ‘이것도 해보면 좋겠다’, ‘저 채널도 테스트해보자’, ‘이 기능은 꼭 있어야 한다’는 말이 쌓인다.
처음에는 이 에너지가 스타트업의 장점처럼 보인다. 모두가 자기 일만 챙기지 않고, 주인의식으로, 어떻게든 더 많이 해내려 한다. 나 역시 창업했을 때나, 작은 스타트업에 합류했을 때 이런 시기를 한참동안 겪었다. 초기 팀의 열정은 분명 귀하다.
문제는 그 열정이 너무 많은 방향으로 흩어질 때다.
팀은 분명 바쁘다. 모두가 열심히 일한다. 그런데 성과의 속도나 팀의 환호는 점점 느려진다. 제품은 조금씩 좋아지는 것 같은데 고객 반응은 애매하다. 마케팅은 여러 채널에서 돌아가는데 무엇이 먹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회의는 늘었고 할 일 목록은 길어졌고 팀원들은 지쳐간다. 여기서 많은 초기 경영진은 ‘우리가 아직 덜 열심히 해서 그런가?"’라고 생각한다. 대개는 아니다. 작은 팀이 느려지는 이유는 열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포기가 부족해서다.
결국 우선순위의 이슈다. 당연히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완성되지 않은 창업팀에게 모든 일은 다 중요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순간 역설적으로 어느 것도 충분히 중요하지 않아져 버린다. 초기 스타트업에서 가장 위험한 말은 ‘이것도 중요하다’다.
작은 팀의 속도는 더 많은 일을 벌이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하지 않을 일을 정할 때 나온다. 모든 고객을 만족시키지 않겠다는 결정, 모든 기능을 만들지 않겠다는 결정, 모든 사업에 한꺼번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결정이다. 보기에는 포기 같지만, 실제로는 팀의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모으는 가장 적극적인 선택이다.
최근 몇 년 사이 이 그림이 한 번 흔들렸다. AI가 들어오면서 작은 팀도 갑자기 많은 일을 해내게 됐다. 카피도 초안도 코드도, 마케팅 소재 수십 개도 몇 분이면 나온다. 손이 부족해서 못 하던 일이 이제는 마음만 먹으면 된다. ‘이것도 해보자’는 말의 비용이 거의 0이 됐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함정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질수록 우선순위 착시는 오히려 심해진다. 예전에는 손이 없어 자연스럽게 포기되던 일을, 이제는 일부러 포기해야 한다. 병목이 실행에서 판단으로 옮겨갔다. 실행이 흔해질수록, 방향을 좁히는 결정의 가치는 오히려 오른다.
마케팅과 프로덕트 일을 하다 보면 이 차이가 특히 선명하게 보인다. 쓸 수 있는 돈과 고객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영역은 여전히 한정적이다. 그래서 더더욱 질문을 좁혀야 한다. 어떤 고객에게 먼저 집중할지, 지금 반드시 검증해야 할 가설은 무엇인지, 이번 실행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얻을지.
포기는 의욕 없는 팀의 언어가 아니다. 빠른 팀의 언어다. 작은 스타트업은 열정만으로 오래 빠를 수 없다. 방향 없는 열정은 속도가 아니라 소모다. AI 덕에 실행이 빨라진 지금은, 방향 없는 소모의 규모도 그만큼 커진다. 진짜 빠른 팀은 더 많이 하는 팀이 아니라 지금 하지 않을 일을 합의한 팀이다.
작은 스타트업의 속도는 열정이 아니라 포기에서 나온다. 무엇무엇을 할 지보다, 무엇은 하고 무엇을 하지 않을지를 정할 때, 팀은 비로소 가장 중요한 문제를 향해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김병완 모사재인 공동대표(디캠프 배치 멘토)는 캐시슬라이드를 운영한 엔비티를 공동창업했고, 이후 컬리에서 유저 성장을 총괄하며 B2C 서비스의 성장과 스케일업에 대해 고민해왔다. 지금은 AI 콘텐츠 스타트업을 창업해, 초기 팀이 성장 임계점을 넘는 방법을 실험하고 있다.
강홍민 기자 kh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