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갔다더니…AI 타고 '왕년의 스타' 델·노키아 부활

입력 2026-06-28 18:17
수정 2026-06-29 01:09
델(PC), 노키아(통신장비), 코닝(광섬유), 지멘스에너지(가스터빈)…. 불과 3~4년 전만 해도 ‘성장동력을 잃었다’고 평가받던 전통 부품·소재 기업이다. 최근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인공지능(AI) 고도화를 위한 빅테크의 인프라 투자 경쟁이 심화하고, 저전력·고성능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늘어나고 있어서다. 이 ‘왕년의 스타’들은 오랜 기간 축적한 본업 경쟁력을 활용해 AI 데이터센터에 최적화한 부품·소재를 공급하며 글로벌 AI산업의 핵심 기업으로 떠올랐다.

◇AI 타고 25년 만에 부활28일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공급망에 속한 상장 기업 200곳 이상이 지난 1년(이달 9일 기준) 동안 MSCI 글로벌지수(약 21% 상승)를 웃도는 주가 상승률을 기록했다. 상당수는 테크, 건설, 철강, 전력 등 다양한 업종에 속한 업력 100년 이상 기업이다.

‘지루하고 따분한 종목’이라고 불리던 이 기업들을 소생시킨 건 연 7000억달러에 달하는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투자다. AI 고도화를 위해선 그래픽처리장치(GPU) 서버 등을 갖춘 AI 데이터센터가 필요하다. GPU 등 반도체를 초고속으로 연결해야 하는 데다 전력 소비 규모가 크고 발열이 심해 일반 데이터센터보다 훨씬 더 많은 설비가 필요하다. ◇전통 산업재 기업도 AI 특수 올라타이에 따라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하드웨어(HW)를 공급하는 기업의 몸값이 뛰고 있다. 상당수는 2000년대 초반 닷컴버블이 꺼지며 급격한 추락을 경험한 테크기업이다. PC 시대의 ‘총아’로 불렸던 델은 최근 AI 서버를 앞세워 부활했다. 2027회계연도 1분기(2026년 2~4월) AI 서버 매출은 161억달러를 기록해 전년 동기보다 여덟 배 가까이 증가했다.

175년 역사의 소재 기업 코닝도 대표적인 수혜주로 꼽힌다. 1990년대 인터넷 붐 당시 광섬유 사업을 크게 키운 코닝은 닷컴버블 붕괴로 주가가 약 100달러에서 1달러로 추락했다. 그런데도 관련 기술을 놓지 않고 버티다가 AI 흐름을 타고 메타, 엔비디아 등에 광섬유 케이블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지난 25일 종가 기준 주가는 1년 전보다 280% 넘게 올랐다.

네트워크 장비업체도 주목받는다. 수천 개 GPU가 한꺼번에 데이터를 주고받으려면 이를 빠르게 연결하는 네트워크와 광통신 장비가 필수적이라서다. 관련 수요에 힘입어 핀란드 통신장비업체 노키아는 25일 종가 기준 주가가 1년 전보다 124% 넘게 올랐고, 닷컴버블 시기 주가 1위이던 미국 시스코시스템스 역시 2000년 3월 기록한 전고점(종가 80달러)을 25년 만인 지난해 12월 넘어섰다.

정보기술(IT)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전통 산업재 기업까지 AI 특수에 올라탔다. 빅테크의 데이터센터를 짓는 150년 역사의 독일 건설 기업 호흐티프가 대표적이다. 미국 최대 철강업체 뉴코어스틸은 데이터센터 건물과 이를 떠받칠 송전탑·전력망용 철강 수요를 함께 빨아들이고 있다. AI 기업에 전기를 공급하는 전력 회사와 데이터센터의 발열을 잡기 위한 냉각설비 업체도 수혜의 한 축을 담당한다. ◇옛 자산의 재발견이 비결이들 기업은 없던 역량을 새로 만들어낸 게 아니다. 보유한 설비와 자산을 그대로 AI 데이터센터로 돌려 역전극을 써냈다. 서버를 구축하던 델과 광섬유를 제조하던 코닝 모두 묵묵히 버틴 본업에 수요가 몰린 사례다. 가스터빈을 주력 제품으로 하는 독일 지멘스에너지는 2010년대 신재생에너지 수요에 밀려 고전했지만 24시간 막대한 전력을 요구하는 데이터센터가 가스 발전을 다시 찾으며 올해 1분기 순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67% 늘었다.

고성장 분야에서 ‘선택과 집중’ 전략을 편 것도 유효했다. 인수합병(M&A)으로 부족한 역량을 채우고 비핵심 사업부는 분사하는 식이다. 미국 전력관리업체 이튼은 수익이 안 나는 차량·e모빌리티 부문을 독립 상장사로 분리해 전력 관리라는 본업에 집중했다. 지난 3월 액체 냉각 전문업체인 보이드서멀을 인수하며 데이터센터 발열 관리라는 빠진 퍼즐을 채웠다. 이에 올해 1분기 이튼의 AI 데이터센터 관련 수주는 전년 동기 대비 약 240% 급증했다.

시장조사업체 델오로의 알렉스 코디빌 애널리스트는 “많은 산업 기업이 AI의 요구에 맞춰 변화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상당수 기업이 100년 넘은 곳인 만큼 AI가 이들 기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모습은 신선하다”고 평가했다.

김미리 기자 mirimi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