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 전시에서 한 번쯤은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겁니다. 형태는 제멋대로 일그러지고, 색은 거칠고, 솜씨라곤 없이 마구 휘갈긴 것 같은 그림. ‘이게 왜 명작이야? 이 정도는 나도 그리겠는데’란 생각이 드는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서울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의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에 걸려 있는 이 그림도 그렇습니다. 반 고흐와 마티스, 피카소의 작품 사이에 걸린 ‘올리브와 갈색의 자화상’입니다. 화가의 이름은 막스 베크만(1884~1950). 험상궂은 아저씨가 자기 얼굴을 거친 붓질로 그린 작품인데, 언뜻 보면 걸작이라 하기엔 좀 부족해 보이지요. 그래서인지 이 그림 앞에 오래 머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사실 베크만은 살아생전에도 그리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그림을 추하다며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독일 정부는 그의 그림을 ‘병든 그림’으로, 베크만을 ‘타락한 인간’으로 낙인찍었습니다. 결국 베크만은 쫓겨나듯 독일을 떠나야 했습니다. 오죽 그림을 못 그렸으면 나라에서 추방까지 당했을까 싶지요.
그런데 베크만에 대한 미술계의 평가는 정반대입니다. 그는 독일이 낳은 역사상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자, 근현대 서양미술사를 통틀어 손꼽히는 거장으로 불립니다. 자화상은 그 유명한 렘브란트의 계보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별것 없어 보이는 이 그림이 왜,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는 걸까요. 막스 베크만의 거친 삶과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그림 잘 그리는 소년베크만은 사실 ‘잘 그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만 해도 그는 단정하고 정교한 그림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거든요.
1884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베크만은 어릴 때부터 남다른 그림 솜씨를 보였습니다. 열네 살 무렵에 이미 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고, 바이마르의 미술학교에서 제대로 기본기를 닦았습니다. 그리고 이 학교를 우등 졸업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정석적인 모범생이었지요. 졸업 뒤엔 파리로 건너가 세잔이나 반 고흐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접했습니다.
스물한 살에 그린 ‘바닷가의 청년들’(1905)은 재능 있는 젊은 화가 베크만의 솜씨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벌거벗은 젊은이들이 바닷가에 모여 있는 장면이 정통 화풍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으로 베크만은 권위 있는 미술상을 받았고, 이탈리아 피렌체로 유학할 기회까지 얻었습니다. 이렇듯 그는 사실적이면서도 개성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서른이 되던 해,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건이 터집니다. 1914년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피 끓는 청년이었던 베크만은 다친 병사를 나르고 상처를 꿰매는 위생병으로 자원입대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지옥을 봤습니다. 세계대전, 표현주의를 낳다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가 처음으로 겪어보는 대규모 참극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부터 인간은 기관총과 대포를 이용해 다른 인간을 ‘기계적으로’ 대량 살상하기 시작합니다. 쏟아지는 총알과 포탄을 피해 병사들은 땅을 길게 판 도랑(참호) 속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이곳에서 그들은 끝없이 죽어 나갔습니다. 쥐 떼가 몰려와 곳곳에 널브러진 동료의 시체를 뜯어먹었지만 쫓아낼 여유 따윈 없었습니다. 몇 달째 갈아신지 못한 군화는 항상 축축했고, 세균에 감염된 발끝은 썩어들어갔습니다. 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군인은 1000만명에 달했습니다.
베크만은 그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그가 배치된 벨기에 이프르 전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 벌어진 곳 중 하나였습니다. 베크만은 매일같이 찢긴 몸뚱이를 실어 날랐습니다. 그리고 베크만의 정신은 참전 1년 만에 무너지고 맙니다. 신경쇠약, 지금으로 따지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때문이었지요. 돌아온 그의 마음은 산산이 부서져 있었습니다.
다시 붓을 들었을 때, 베크만의 그림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차분하고 사실적이던 화면은 사라졌습니다. 형태는 뒤틀렸습니다. 공간은 사람을 짓누를 듯 좁아졌습니다. 색은 어두워졌습니다. 잘 그리던 사람이 갑자기 ‘못 그리게 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전쟁 때문에 맛이 가 버린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베크만은 일부러 이렇게 그린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시대의 분위기를 담으려면 ‘틀리게’ 그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화나 웹툰으로 예를 들어 그 이유를 설명해 보겠습니다. 만화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실제와 다르게 변형돼 있습니다. 예를 들어 등장인물이 화나면 눈이 위로 치켜 올라가고 이마에 핏줄이 솟습니다. 실제 사람은 화날 때 그런 얼굴을 하지 않지요. 하지만 만화적인 과장 덕분에 우리는 등장인물의 감정을 한눈에 읽을 수 있습니다. 베크만도 전쟁으로 일그러진 인간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이 같은 미술의 흐름을 ‘표현주의’라고 합니다. 그 직전의 인상주의는 눈에 비친 빛과 풍경, 즉 ‘바깥에서 받은 인상’을 그렸습니다. 반면 표현주의는 반대로 마음속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그렸습니다. 보이는 표면이 아니라 화가가 느끼는 삶을 그리려면, 그 모습은 현실과 달라야 했습니다. 사실 이는 반 고흐나 ‘절규’를 그린 뭉크 등 선배 화가들이 먼저 걸어간 길이기도 했습니다.
마침 시대도 그쪽으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사진 기술이 전보다 더 발달하면서 ‘눈에 보이는 걸 똑같이 베끼는 그림’이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거든요. 카메라가 1초면 하는 일을 화가가 굳이 며칠씩 매달릴 이유가 없어진 겁니다. 추락처음에는 베크만의 그림을 보고 시큰둥해하던 독일 사람들은 점차 그의 작품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독일의 상황은 극도로 어지러웠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경제는 패전의 충격, 막대한 배상금 부담 때문에 미쳐 돌아갔습니다. 물가가 오르고 돈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지폐는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습니다. 지폐를 땔감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거리 곳곳에는 전쟁으로 부상을 입은 사람들이 넘쳐났습니다. 이런 혼란 속을 살던 사람들은 베크만의 일그러진 그림에서 자기 시대를 봤습니다.
베크만에게 전성기가 찾아온 건 192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그는 40대 초반의 나이로 프랑크푸르트의 명문 학교인 슈테델 미술학교 교수가 됐고, 1927년에는 권위 있는 명예제국상과 뒤셀도르프 금메달도 받았습니다. 독일과 스위스 등지에서 베크만을 조명하는 대규모 회고전이 잇달아 열리면서 그는 가장 존경받는 독일 화가 중 하나가 됐습니다. 이 무렵 그린 자화상 ‘턱시도를 입은 자화상’(1927)에는 검은 정장을 빼입고 관객을 똑바로 내려다보는, 다부지고 자신만만한 남자가 그려져 있습니다. 유럽에서 손꼽히는 거장다운 당당한 모습이었지요.
하지만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며 모든 게 무너졌습니다. 히틀러와 나치에게는 '진짜 독일 미술'의 정답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깨끗하고 늠름하고 사진처럼 사실적인 그림. 위풍당당한 군인, 건강한 가족, 웅장한 풍경 같은 것들을 그린 그림. 한마디로 '보기 좋고 알아보기 쉬운' 그림만이 옳았습니다.
반대로 베크만처럼 일그러지고 어두운 현대 미술 작품은 전부 '퇴폐 미술'로 몰렸습니다. "병들었다", "타락했다", "정신 나간 자들이 그린 쓰레기다"…. 베크만의 그림에는 전쟁의 참상, 인간의 추함, 시대의 불안처럼 나치가 싫어하는 불편한 진실이 담겨있었습니다.
나치는 이를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느꼈습니다. 그래서 집권하자마자 베크만을 교수직에서 쫓아냈습니다. 여기에 더해 베크만을 '나라를 좀먹는 예술가'로 낙인찍었습니다. 베를린의 미술관에 있던 그의 이름을 단 전시실은 철거해버렸습니다.
베크만에 대한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1937년 나치는 독일 전역의 미술관에서 베크만의 작품 500점 이상을 뜯어냈습니다. 그리고 다른 현대미술가들의 작품과 함께 모아 ‘퇴폐 미술전’이라는 전시를 열었습니다. 이 전시에서 나치는 그림들을 일부러 삐뚤빼뚤 걸고, 벽에는 작품을 비웃는 조롱 문구를 큼지막하게 써 붙였습니다. 감상하라고 연 전시가 아니라 조롱하라고 연 전시였지요. 국가가 직접 나서서 예술가들을 조리돌림한 것입니다.
결국 베크만은 짐을 싸서 독일을 떠났습니다. 그가 향한 곳은 이웃 나라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이었습니다. 이 무렵 그는 ‘뿔나팔을 든 자화상’을 그립니다. 그림 속에서는 줄무늬 옷을 입은 남자가 손에 뿔나팔을 들고, 텅 빈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디선가 올 대답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처럼요. 독일이 자랑하는 거장이었던 그는 이제 침묵 속에서 나팔을 들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고독 속의 걸작1940년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집어삼키면서 베크만은 궁지에 몰립니다. 다른 곳으로 도망치려 해도 이미 독일이 유럽 대륙 대부분을 집어삼킨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으로 도망치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비자가 나오지 않아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는 나치가 쫓는 '퇴폐 예술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시기 베크만의 가장 위대한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10년 간의 망명 생활 동안, 그는 평생 그린 작품의 3분의 1을 암스테르담의 좁은 셋방에서 숨어 살며 그렸습니다. 그중엔 거대한 세 폭짜리 그림이 여러 점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출발'입니다. 세 폭으로 나뉜 이 그림의 양옆에는 고문당하고 결박당한 사람들, 즉 세상의 폭력과 고통이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한가운데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왕과 왕비가 아이를 안고 작은 배에 올라 탁 트인 바다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자유'를 찾아가는 인간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1942년 미국으로 넘어가 뉴욕현대미술관(MoMA)이 사들이게 됩니다.
다행히도 베크만은 천신만고 끝에 살아남아 종전을 맞았습니다. 1947년 베크만은 다른 예술가들과 함께 안전하고 풍요로운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미국은 그를 따뜻하게 맞았습니다. 베크만은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쳤고, 베네치아비엔날레에서 상을 받으며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러던 1950년 12월의 어느 날. 베크만은 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해 완성해 미술관에 걸린 자신의 그림, '푸른 재킷을 입은 자화상'(1950)을 보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화면 속 그는 짙은 푸른색 재킷을 입고 정면을 향해 서 있습니다. 재킷 안으로 붉은 셔츠가 강렬하게 빛나고,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다른 손으로는 담배를 입가로 가져가고 있습니다. 색은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선명합니다. 가슴은 떡 벌어졌고 몸은 다부집니다. 마치 전쟁과 나치의 탄압도 자신을 무너뜨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 같습니다. 다만 표정은 왠지 씁쓸해 보입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은 옆으로 비껴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을지도 모릅니다. 미술관으로 가던 그 길에서 베크만의 심장은 갑자기 멎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멀쩡하게 잘 그릴 실력이 있던 그는 왜 이렇게 그림을 그렸을까요. 작품은 왜 대단하다는 걸까요.
답은 베크만의 삶에 있습니다. 그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어낸 사람이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참혹한 전장에서 정신이 무너졌고,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병든 퇴폐 미술가’로 몰려 조국에서 쫓겨난 뒤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참혹한 시대였습니다. 이런 세상을 살면서 매끈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린다면 그건 거짓말이라고, 베크만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틀린 세상을 닮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전쟁과 혼란의 시대를 살아낸다는 것이 실제로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정직하게 그림에 쏟아냈습니다. 그렇기에 베크만의 그림은 불편합니다. 가판대의 상품을 보는 것처럼 잠깐 보고 ‘예쁘다’, ‘별로네’를 판단한다면 부정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베크만의 그림 앞에서 '사실적으로 잘 그렸는가'가 아니라 '이 그림은 진짜인가'를 묻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베크만은 자신이 느낀 고통에서 도망치거나 이를 억지로 아름답게 그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베크만의 그림에는 한 사람이 겪은 고통과 불안이, 시대가, 나아가 인간 존재가 담겨 있습니다. 베크만의 작품이 명작으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무겁고 음울하고 읽기 어렵지만 누구나 명작으로 꼽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처럼요.
그러니 앞으로 세종문화회관에 걸린 베크만의 그림을 비롯해 이런 ‘불편한 그림’을 마주친다면, 그 앞에서 한 번쯤 발을 멈춰 보시길 권합니다. 일그러진 모양과 색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그 안에 진실이 담겨 있는지를 들여다보세요. 어쩌면 ‘못 그렸다’고 생각했던 그 작품이 당신의 ‘인생 그림’이 될지도 모릅니다.
<i>*이번 기사는 메트로폴리탄미술관·뉴욕 현대미술관(MoMA)·하버드 미술관(부슈-라이징거)·세인트루이스미술관·디트로이트미술관·워싱턴 국립미술관·런던 내셔널갤러리 소장품 해설, 2002~03년 퐁피두센터·테이트 모던·MoMA 공동 회고전 도록 Max Beckmann (Sean Rainbird 편), Max Beckmann in New York (Sabine Rewald 지음), Max Beckmann: A Retrospective (Carla Schulz-Hoffmann·Judith C. Weiss 편)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미술 소식과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디트로이트 미술관 걸작전 <인상주의를 넘어: 디트로이트 미술 걸작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시리즈에서 다룬 여러 거장들의 명작들을 실제로 볼 기회입니다. 최근 출간된 책 '명화 시리즈' 완결편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과 함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