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주는 시대를 상징한다. 당대의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미래를 보여주며, 이익으로 증명하는 기업이 주도주에 오른다. 2026년 한국 증시는 반도체가 독주했다.
특히 삼성전자는 지난 6월 2일 하루 만에 시총이 70조원 넘게 불어나며 글로벌 시총 10위에 오르는 기록을 썼다. 반도체가 한국 증시를 이끄는 걸 넘어 글로벌 AI 공급망의 핵심으로 재평가받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SK하이닉스 역시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며 한때 삼성전자를 제치고 시가총액 1위에 올랐다.
올해 주도주의 명분은 숫자(실적)와 이익 성장의 가파른 그래프다. 증권가에서는 올해와 내년 코스피 전체 영업이익 가운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지하는 비중이 70% 안팎에 이를 것으로 본다. 코스피 시가총액의 60% 이상을 두 종목이 나눠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문제는 주도주 쏠림이 풀리는 순간이다. 버블 랠리 막판 주도주가 상승을 멈추는 순간 시장은 급속히 하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기 때문이다. 2000년 삼성전자, 시총 1위 등극
한국 증시의 주도주는 최근 20년간 평균 2~5년 주기로 교체돼왔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증시는 공기업의 독무대였다. 기업의 체력을 바꾼 모멘텀은 외환위기였다. 1997년 97조8850억원이었던 코스피200 종목 시총은 1998년 48조7256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부채에 기댄 문어발식 확장은 무너졌고 대우그룹 등 대기업 해체와 구조조정이 진행되면서 시가총액 상위권 구성도 빠르게 변했다.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계열사를 팔고, 빚을 줄이고, 핵심 사업에 집중했다.
삼성전자는 이 국면에서 반도체를 발판 삼아 비상했다. IT 활황이 뒷받침되면서 2000년부터 시가총액 1위 자리에 올라섰다. 또 다른 주도주는 통신이었다. 이동통신 보급 확대와 CDMA 상용화는 한국통신(KT)과 SK텔레콤을 한국 증시의 대표 성장주로 만들었다. SK텔레콤은 1999년 4월 국내 증시 최초의 ‘황제주’(주당 100만원 이상 주식)에 등극했다. SK텔레콤 주가 상승세는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주가는 1년 만에 481만원(2000년 3월 6일)을 기록했다. 보통주가 기록한 사상 최고가다. 이후 회사는 10대 1 액면분할을 단행했다.
닷컴버블이 꺼진 뒤 코스피는 긴 박스권에 갇혔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부터 반전이 시작됐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면서 한국 증시의 주도권은 조선·철강·화학·해운·기계로 이동했다. 중국이 공장을 짓고, 항구를 넓히고, 원자재를 빨아들이는 동안 한국은 선박과 철강, 화학제품, 산업기계를 팔았다. 중국 특수와 주식형 펀드 열풍이 겹친 코스피는 2000선을 돌파했다.
당시 코스피 시가총액 3위는 조선업 초호황을 누린 현대중공업이었다. 유가증권시장에서 현대중공업보다 시가총액이 큰 기업은 삼성전자와 포스코뿐이었다. 2007년 아직 세계화에 성공하지 못한 자동차는 시가총액 10위권 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차화정 이어 중국발 ‘소비재’ 시대 열려
2008년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실물경제 충격이 덮쳤고 초저금리와 양적완화 시대가 열렸다. 중국은 유럽 등 선진국이 주저앉는 사이 ‘G2’로 도약했다. 한국은 2010년대 중반까지 중국발 성장 아래서 수혜를 누렸다. 자동차 업종은 미국 차 빅3의 몰락기를 틈타 경쟁력을 키웠고 2007년 등장한 ‘아이폰’은 피처폰 일색이던 모바일 시장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았다. 이 혁신이 곧 2010년대 모바일 시대의 신호탄이 됐다.
2010년대 전반 한국 증시는 ‘차화정(자동차·화학·정유)’으로 막을 열었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나던 시점, 자동차는 수출 회복을 견인했고 화학·정유는 원자재 사이클과 맞물리며 증시의 맨 앞에 섰다. 현대차, 현대모비스, 기아가 시총 톱5에 올랐다.
호황은 길지 않았다. 금융위기의 후폭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유로존 위기가 터졌고 한국 경제는 ‘반도체 겨울’에 구조적 저성장의 터널에 들어섰다. 2012년 이후 경기민감주가 숨을 고르자 투자자들의 시선은 새로운 테마로 향했다.
여행·레저, 면세점, 화장품, 엔터 등 중국 소비 관련 종목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중국이 ‘세계의 공장’을 넘어 ‘세계의 소비시장’으로 변신하면서 한국 기업들도 수혜를 입었다. 아모레퍼시픽은 2015년 장중 한때 주당 400만원을 돌파하면서 시가총액 6위에 올라섰고 롯데쇼핑, LG생활건강 역시 시총 상위권에 빠르게 진입했다.
바이오도 이때 씨앗을 뿌렸다. 셀트리온은 바이오시밀러 ‘램시마’로 2013년 9월 유럽 판매 승인을 획득하며 시장의 주목을 받았고 한미약품은 2015년 빅파머들과 연이어 계약을 따내며 잭팟을 터뜨렸다. 미래 주도주가 숨을 고르며 발판을 다지던 시기였다. SK하이닉스와 네이버가 시가총액 상위권에 진입한 것도 이 무렵이다. 반도체와 플랫폼, 바이오라는 다음 세대 주도주가 동시에 몸을 풀던 시기였다.
2016년 사드 사태는 중국 소비주에 직격탄을 날렸다. 자동차와 정유도 글로벌 경기 둔화 속에 힘을 잃었다. 차화정과 중국 소비주의 빈자리를 채운 것은 반도체였다.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 투자가 늘고 스마트폰 고사양화가 이어지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폭발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나란히 시총 1·2위에 올랐다. 두 기업의 합산 시가총액이 국내 증시의 4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영향력이 커졌다. 이때부터 코스피는 본격적으로 반도체 이익 사이클에 묶였다. 코로나 버블과 BBIG,
유동성이 만든 성장주의 전성기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 증시에 전례 없는 충격을 줬다. 동시에 새로운 주도주를 탄생시켰다. 일상이 비대면으로 이동하면서 플랫폼, 바이오, 게임, 배터리가 가장 큰 수혜를 입었다. 이 시기 한국 증시의 상징은 BBIG였다. 배터리, 바이오, 인터넷, 게임이다.
LG화학과 삼성SDI는 전기차 배터리 성장주로 재평가받았고,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셀트리온은 바이오 대표주로 몸값을 키웠다. 네이버와 카카오는 플랫폼 성장주로 각광받았다. 엔씨소프트와 넷마블 등 게임주는 언택트 소비 확대의 수혜를 받았다. 시장은 현재 이익보다 미래 시장 지배력을 샀고, 초저금리와 유동성은 성장주의 밸류에이션을 정당화했다.
그러나 금리가 오르자 상황은 바뀌었다. 2022년 글로벌 인플레이션과 금리인상, 중국발 공급과잉, 성장성 둔화가 겹치면서 버블은 빠르게 꺼졌다. BBIG 주도주의 퇴조는 한국 증시에 씻기 힘든 충격을 남겼다.
2차전지 열풍이 남긴 상흔을 덮은 것은 ‘조선·방산·원전’의 약진이었다. 반도체 일극 체제였던 한국 증시에 글로벌 지정학 리스크와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흐름이 겹치며 조방원은 새로운 주도 테마로 부상했다.
2026년은 ‘반도체의 해’다. 이번 장세는 플랫폼 기업 중심의 AI 서비스가 아니라 한국 기업이 공급망을 쥐고 있는 AI 인프라가 주도하고 있다. 시장 전체를 놓고 보면 반도체주는 여전히 가장 강한 실적과 이익 성장세를 갖춘 업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은택 KB증권 연구원은 “그동안 금리가 오르자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먼 미래의 이익을 끌어온 주식들이었다”며 “이번 사이클의 마지막 생존자는 실적으로 증명되는 반도체일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김영은 기자 kye021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