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팥·벌레 그림 30년…"작고 약한 것들이 세상을 떠받친다"

입력 2026-06-25 10:09


냉장고 채소칸에서 싹이 난 감자, 징그러운 나방….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표 작가인 정정엽(64)은 1980년대부터 이처럼 하찮게 여겨지거나 외면받는 것들을 그려왔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것들이 실은 거대한 생명의 그물을 이루며 세상을 떠받친다는 것, 인간도 그 일부라는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다.

지금 서울 인사동 갤러리밈에서 열리는 개인전 '지구독대여자'에서 정정엽은 여성이 겪는 어려움을 정면으로 다룬 작품들을 선보인다. ‘지구를 독대하는 여자’라는 제목부터가 세상의 차별과 위협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뜻이다.




나무판에 그린 '소녀생존기' 연작에서 소녀들은 힘차게 뛰어오른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편견, 자기 안의 두려움을 이겨내고 도약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표현했다. 물방울과 오래된 식물 등 함께 그려진 연약한 존재들이 소녀를 응원하는 듯하다. 나무 표면의 결을 따라 자연스레 쌓아올린 붓질도 인상적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작품은 가로 4m에 육박하는 대작 '텃밭'이다. 손바닥만 한 텃밭에 사는 채소와 벌레를 실물보다 몇 배 크게 그려 화면을 가득 채웠다. 먹거리 채소를 키우는 손바닥만한 텃밭에서도 다양한 생물들이 치열하게 살아간다는 것, 그러면서도 이 씨앗과 생명들은 서로 연결되고 순환하며 지구의 생태계를 이어준다는 사실을 표현했다. 그 중에서도 작가는 혐오스럽다며 멸시당하는 나방, 싹이 나면 독이 생겨 버려지는 싹 난 감자를 집중 조명한다.

마지막 방의 '씨앗-풍경'에는 붉은 팥 수천 알이 중력을 거슬러 새 떼처럼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갤러리는 “여성의 노동을 상징하는 팥 알갱이들이 바다 위 하늘로 날아오르는 풍경”이라며 “팥 알갱이, 여성의 노동 같은 하찮게 여겨졌던 것들이 거대한 생명의 우주를 이룬다는 사실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검은 천에 색실과 노끈으로 글자를 한 땀씩 수놓은 자수 걸개 '소녀생존기'도 눈길을 잡아끈다. 우리 사회를 흔든 디지털 성범죄 사건들을 하나씩 언급한 뒤 "만든 놈, 판 놈, 본 놈 모조리 처벌하라"는 구호를 썼다.

손에 잡히는 소재를 통해 관념을 그림으로 바꾸는 정정엽의 솜씨를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전시다. 마음 속 두려움과 어둠을 더듬어 통과한다는 생각은 나무 결을 따라 그린 붓질로, 차별과 폭력에 함께 맞서자는 외침은 색실과 노끈을 꿴 바느질로 표현됐다. 거대한 화면과 세밀한 묘사가 부딪히며 빚어내는 긴장도 감상의 묘미를 더한다. 전시는 8월 12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