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제도가 도입된 지 5년차에 접어들었지만 시장이 여전히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일반 벤처캐피털(VC)과 달리 외부 출자와 해외 투자 비중이 제한되는 등 엄격한 규제를 적용받는 게 원인으로 꼽힌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해 말 기준 13곳의 CVC가 조성한 85개 투자조합(펀드)의 약정액이 2조3903억원으로 집계됐다고 24일 밝혔다. 2024년 말(2조368억원)보다 액정액이 17.4% 늘었다. 지난해 신규 설립된 펀드는 15개다.
펀드 약정액이 늘어나긴 했지만 CVC 시장 자체는 성장이 정체된 상태라는 평가가 나온다. 2023년 13곳이었던 CVC는 2024년 14곳으로 늘었다가 지난해 다시 13곳으로 줄었다. 펀드 약정액도 공정위가 관련 통계를 처음 집계한 2022년 말(2조3900억원)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 같은 기간 VC 전체 약정액은 51조3040억원에서 66조7778억원으로 30.2% 증가했다.
이마저도 가장 규모가 큰 포스코기술투자(1조1805억원)가 전체 약정액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상위 5개사를 제외한 나머지 CVC는 약정액이 1000억원에도 못 미친다. 전체 CVC의 연간 신규 투자액은 2022년(2118억원)과 비교해 지난해(1939억원) 더 줄어들었다. 산업통상부는 2028년까지 13조원 규모의 CVC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밝힌 바 있지만 현재 성장세로는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CVC 제도는 2021년 말 도입됐다. 기존에는 금산분리 원칙에 따라 금융회사인 VC를 일반지주회사가 소유할 수 없었지만 벤처투자 촉진을 위해 공정거래법을 개정해 일반지주회사의 VC 소유를 허용했다.
대신 일반 VC와 달리 CVC는 엄격한 규제를 적용받는다. 일반 지주회사는 CVC의 지분 100%를 보유해야 하고, CVC는 자금 대여 등이 불가능하고 투자 행위만 가능하다. 펀드 조성 시 외부자금은 전체 펀드 조성금액의 최대 40%로 제한된다. 또 CVC의 해외 투자는 총 자산의 20%까지만 가능하다.
업계에선 이런 규제가 적용되는 한 CVC 시장이 활성화되긴 어렵다고 말한다. 외부 출자 40% 제한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일반 VC는 연기금과 공제회, 민간 금융기관, 정부 주도 모태펀드 등에서 제한 없이 자금을 끌어모아 펀드를 결성하지만 CVC는 펀드에 회사 자금을 60% 이상 넣어야 한다. 1조 규모의 펀드를 조성하려면 6000억원은 회사의 돈을 넣어야 한다는 얘기다. 일반 VC에 비해 펀드 규모를 키우는 데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해외 투자를 20%로 제한하는 것도 CVC 시장 활성화를 막고 있다. 국내를 넘어 해외 유망기업에 투자하고자 하는 주요 대기업들은 이 제도가 발목을 잡아 CVC를 활용해 해외 투자를 하는 데 한계가 있다.
지난해 9월 이재명 대통령이 참석한 국민성장펀드 국민보고대회에서도 외부 출자 한도 제한 완화 등 CVC 규제 해소가 필요하다는 업계의 목소리가 나왔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은 "벤처캐피털이 금융기관을 끼고, 정부 펀드가 같이 들어가면 성공률이 높아지지만 금산분리 제도로 대기업은 이를 자유롭게 할 수 없다"며 "오랜 숙제인 금산분리 제도를 바꿔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진옥동 신한금융그룹 회장도 "CVC를 금산분리로 묶어놓은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며 "CVC가 GP 역할을 해준다면 은행권도 같이 들어가 파이가 커질 수 있다"고 했다.
공정위는 CVC의 외부 출자 한도를 기존 40%에서 50%로 늘리고, 총 자산 중 해외투자 비중을 기존 20%에서 30%로 확대하는 등 관련 규제 완화를 추진하고 있다. 다만 관련 법 개정은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업계에선 더 파격적인 규제 완화 없이는 시장 활성화는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