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잉크와 푸른 잉크를 내어놓고 공화국기(인공기)를 그리기 시작하였다. 우리 집 문간에 달기 위하여서다. (중략) 아내와 서로 보고 멋없이 웃었다. 아침저녁으로 국기를 고쳐 그려야만 하는 우리 신세를 자조함에서였다.”
6·25전쟁 중 작고한 김성칠 서울대 사학과 교수의 일기를 엮은 <역사 앞에서>에 나오는 1950년 7월 3일자의 한 대목이다. 전쟁에 휘말린 한 사학자의 일기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았다. 수많은 목숨이 죽어 나가는 마당에 무슨 대수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인민군의 서울 점령 닷새 만에 살아남기 위해 침략자의 국기를 그려야 했던 선생의 심정이 유독 가슴에 와닿는다.
내일로 76주년을 맞는 6·25는 동족상잔의 내전이자 인류사에서 가장 많은 나라가 참전하거나 힘을 보탠 국제전쟁이기도 했다. 중국과 소련이 북한을 지원하고, 미국을 포함한 16개국 유엔군이 남한을 도왔다. 물자 지원까지 포함하면 63개국이 대한민국 편에 섰다. 그 명단에는 없는 일본이지만 후방 지원 기지로서의 역할은 결코 작지 않았다.
미군은 일본에 주둔 중인 병력과 무기를 제때 한반도로 투입해야 하는데 수송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다. 마침 일본에는 전후 처리를 위해 미국이 대여한 전차상륙함(LST) 100척가량이 있었다. 미군은 LST 수십 척과 일본 상선을 활용해 해상 수송 문제를 풀 수 있었고 일본인 선원과 항만 근로자들이 병력과 무기를 싣고 대한해협을 건넜다. 개전 후 반년의 기록으로만 8000명이 넘었다.
인천상륙작전, 원산상륙작전, 흥남철수작전도 이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해상보안청의 특별소해대(기뢰 제거 소해정 19척과 모선 1척)도 파견됐다. 작전 중 사망한 선원만 해상보안청 대원 1명을 포함해 57명이다. 일본이 6·25 특수를 톡톡히 누린 것과는 별개로 이들이 우리의 자유를 지키는 데 적잖은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76년 전 일본 민간 선원들의 ‘숨은 활약’이 필요했듯이 지금은 일본과의 군사 협력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북한 중국 러시아의 밀착과 위협의 강도는 세지는데, 우리가 미국에만 의존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역시 다르지 않다. 한국과의 상호군수지원협정(ACSA) 체결에 적극적인 이유다. 유사시나 평화유지 활동 및 재난 대응 때 탄약, 연료, 식량 등을 상호 지원할 수 있는 협정으로 한국은 17개국과, 일본이 11개국과 맺고 있다. 멀리 있는 유럽 국가들과는 잘도 맺는 협정인데 정작 위급 사태 때 바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한·일 간에는 여전히 깊고 넓은 골이 있다.
2012년 이명박 정부 때 국내 반대 여론에 밀려 체결 직전 좌초됐듯 민감한 문제인 건 사실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이달 초 취임 1년 기자회견에서 “현실적 필요성이 있다”면서도 “우리 국민 정서상 받아들이기가 현재는 어렵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현 정부의 지지층인 진보 진영의 반대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협정이 더 도움이 되는 건 아무래도 지근거리에 ‘주적(主敵)’이 있는 우리 쪽이다. 일본에 군사력 강화의 명분을 주고 자위대의 한반도 진출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반대하면서 “한국은 가장 적대적인 국가”라고 위협하는 북한 도발에는 눈감는 게 타당한 일일까. 과거가 현재와 미래의 발목을 잡는 꼴이다.
김 교수는 다른 날 일기에서 하나는 인민을 채찍질해 밤낮으로 침공 준비에 전력을 기울였고, 하나는 “미국이 말리지만 않으면 1주일 안으로 평양을 석권할 수 있다”고 큰소리만 뻥뻥 치고 실제로는 침략에 대처할 준비를 게을리했다고 한탄했다. 우리가 반드시 대비해야 하는 것들을 방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