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6월 22일 10:17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일론 머스크가 2002년 창업한 스페이스X가 지난 12일 나스닥시장에 입성했다. 총 750억달러(약 103조원)를 조달하며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업공개(IPO)로 기록됐다. 초기 투자자 피터 틸의 파운더스펀드는 2008년 스페이스X가 로켓 발사 3회 연속 실패로 파산 직전에 몰렸을 때 2000만달러를 처음 투자했다. 이후 18년간 추가 투자를 이어가며 총 6억달러를 수혈했다. 현재 파운더스펀드의 스페이스X 지분 가치는 500억달러를 넘어섰다. 산업의 판도를 바꿀 만한 혁신 기업이 탄생하려면 긴 호흡의 자본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시간 부족에 허덕이는 사모펀드들기업을 인수해 가치를 올린 뒤 되파는 사모펀드(PEF)도 시간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특히 최근엔 기업 가치를 끌어올리는 데 걸리는 시간이 더 길어지고 있다. 지정학적 변화로 소재·부품의 적기 저가 공급이 어려워지면서 공급망 재편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
엑시트(자금 회수) 환경도 나빠졌다. 저금리 시대 유동성이 넘치던 2015~2018년 활발히 결성된 펀드가 순차적으로 만기를 맞으면서 회수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고 있다. 저금리 시절 높은 밸류에이션(실적 대비 주가수준)으로 인수한 자산들의 몸값은 기대만큼 오르지 않았다. 금리가 껑충 뛰면서 보유 기업의 상대 가치가 낮게 매겨진 것이다. 고금리는 새로운 기업을 사들일 때도 문제가 된다. 부족한 인수대금을 메우기 위해 인수금융을 받았을 때 치러야 할 금융비용이 올라간다.
출자자(LP)로부터 자금을 모아 7~10년 안에 투자부터 회수를 마쳐야 하는 PEF 운용사들이 ‘시간 부족’을 호소하게 된 배경이다. 최근 대형 PEF 운용사들은 성장 여력이 있는 우량 자산을 서둘러 팔기보다 보유 기간을 늘려 가치를 더 키우는 컨티뉴에이션 비히클(CV)로 눈을 돌리고 있다.
CV는 GP(운용사)가 주도해 자산의 보유 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통칭한다. 기존 펀드의 자산을 별도 투자기구로 이전하는 구조가 전형적이지만, 신규 LP를 추가 모집해 기존 LP에 유동성을 제공하는 방식도 포괄적으로 CV로 본다. 그간 PEF의 엑시트 수단은 주로 상장(IPO), 인수합병(M&A), 배당 세 가지였다. CV는 자산을 매각하지 않고도 기존 LP에 투자금 회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제4의 엑시트 수단’으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톱 PEF들, 줄줄이 CV 검토국내 운용자산(AUM) 상위권 PEF가 잇달아 CV를 도입하고 있다. IMM프라이빗에쿼티(PE)는 UBS를 주관사로 선정하고 반도체용 산업가스 공급사 에어퍼스트 CV를 조성 중이다. 회사 측은 “이번 CV는 장기 성장 전략의 일환”이라며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확대에 따른 구조적 성장 국면에 진입한 에어퍼스트를 더 키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한앤컴퍼니는 루트로닉, SK스페셜티 등 일부 우량 자산에 대해 신규 LP를 추가 모집해 보유 기간 연장을 검토 중이다. GP 주도로 보유 기간을 연장한다는 점에서 업계에서는 실질적인 CV로 분류한다. UCK파트너스도 일부 우량 포트폴리오를 대상으로 CV 조성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 처음 CV를 도입한 곳은 한앤컴퍼니다. 2022년 쌍용C&E를 대상으로 당시 아시아 최대 규모인 1조9000억원의 CV를 조성했다. 시멘트산업 친환경 전환과 환경사업 확장 등 중장기 밸류업 과제를 완주하기 위한 장기 투자 결정이었다. 글로벌 세컨더리 전문 운용사 콜러캐피탈이 신규 LP로 참여했다. MBK파트너스는 2020년 BHC를 기존 바이아웃 펀드에서 스페셜시추에이션펀드(SSF)로 이관했다. 기존 SPC를 새 SPC로 교체하면서 캐나다의 온타리오연금 등 신규 투자자가 참여하는 구조로, GP는 유지하되 투자기구를 바꿔 보유 기간을 연장했다는 점에서 CV와 비슷한 효과를 냈다. CVC캐피탈도 지난해 온라인 여행 플랫폼 여기어때를 대상으로 CV를 집행하며 뒤를 이었다. 국경 없는 ‘연장전’…글로벌 이미 대세국내 LP가 CV에 참여하는 사례는 흔치 않다. 기관투자가 담당자들이 임기 내 실적 시현을 선호하다 보니 CV를 추진하는 GP 자체가 많지 않다는 설명이다. 금융회사 계열 LP는 규제 부담이 상당하다. 5년 이상 장기 지분투자를 하면 위험가중치가 높게 계산된다. 제도적 장벽도 있다. 글로벌 주요 펀드는 정관에 CV를 출자자협의회(LPAC) 결정 사항으로 규정해놨다. 하지만 국내 펀드는 이런 내용이 정관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출자자 전원 동의를 거쳐야 CV 도입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국내 운용사들은 CV 자금을 모을 때 홍콩 또는 싱가포르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반면 글로벌 시장에선 수년 전부터 CV가 주류 엑시트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미국 비스타에쿼티파트너스는 기업용 소프트웨어 회사 클라우드소프트웨어그룹을 대상으로 대형 CV를 집행했다. 뉴마운틴캐피탈은 헬스케어 마케팅 전문사 리얼케미스트리를, KSL캐피탈은 북미 최대 스키 리조트 운영사 알테라마운틴을 새 투자기구로 이관했다. 아시아에서도 트루스타캐피탈의 맥도날드차이나, IDG캐피탈의 틱톡 모회사 바이트댄스 등 13개 자산을 묶은 CV가 집행됐다.
글로벌 CV 거래 규모는 지난해 1050억달러를 기록해 2016년(70억달러) 대비 15배로 급증했다. CV는 작년 상반기 기준 전체 PE 엑시트의 19%를 차지했다. 기존 GP와의 관계를 바탕으로 검증된 자산에 투자할 수 있다는 게 CV 투자의 매력이다. PEF업계 관계자는 “CV를 단순한 만기 연장 수단이 아니라 우량 자산을 더 키울 수 있는 수단으로 보는 이가 점점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CV 외에도 만기 제약을 없애려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에버그린 펀드는 만기 없이 지속해서 운용된다. 새 투자자가 수시로 참여할 수 있고, 기존 LP는 원할 때 회수가 가능하다. 퍼페추얼 펀드(영구펀드)는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청산 자체를 상정하지 않는 영구 운용 구조다. 블랙스톤은 부동산·PE·크레디트·인프라 등 4개 에버그린 펀드를 운용 중이며, KKR은 K시리즈 퍼페추얼 펀드 AUM이 1년 만에 160억달러에서 340억달러로 두 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컨티뉴에이션 비히클(CV)
사모펀드(PEF) 운용사(GP)가 기존 펀드의 자산을 새로운 투자기구(비히클)로 이전해 보유 기간을 연장하는 것을 말함. 넓게는 GP가 주도해 기존 자산의 보유 기간을 연장하는 거래 전반을 CV로 통칭하기도 한다.
최다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