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그룹 코르티스의 수록곡에서 나온 ‘영크크(영 크리에이터 크루)’는 요즘 젊은 세대를 상징하는 밈(Meme)이다. 이 독특한 조어에는 트렌드에 밝으면서 콘텐츠를 만들어내는 젊은 창작 집단이라는 뜻이 담겼다. 기성세대의 틀을 벗어나 자신이 좋아하는 콘텐츠를 직접 생산하는 이들의 특성이 문화시장의 판을 흔들고 있다.
‘영크크’ 바람이 극장가에도 불고 있다. 스무 살짜리 감독 케인 파슨스가 선보인 ‘백룸’이 글로벌 박스오피스에서 흥행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가운데 국내 극장가에서도 20~30대 신예 감독들이 연출한 영화가 호평받고 있다.국내서도 100만 돌파 ‘백룸’
영화 ‘백룸’은 대중문화 시장에서 하위 장르로 여겨졌던 유튜브 밈이 주류 장르인 스크린을 역으로 장악한 사례다. 22일 북미 영화집계 플랫폼 박스오피스모조 등에 따르면 ‘백룸’은 지난달 개봉해 2억 달러가 넘는 글로벌 티켓 매출을 올렸다. 1000만 달러의 제작비로 스무 배가 넘는 수익을 거두며 할리우드 인디 영화 명가인 A24의 역대 최고 흥행작에 이름을 올렸다.
상반기 외화 약세가 두드러지는 국내 극장가에서도 나홀로 흥행 질주를 보였다. 지난달 27일 개봉해 외화 호러 스릴러로는 조던 필 감독의 ‘어스’ 이후 7년 만에 100만 관객(누적 108만)을 돌파하는 등 박스오피스 상단을 지키고 있다.
‘백룸’은 미국 등 서양권에서 유명한 도시전설에서 출발한 영화다. 탈출 불가능한 노란 벽지의 공간에 갇혀 미지의 괴물에 쫓긴다는 설정으로, 2019년부터 이미지와 짧은 영상 등으로 인터넷에 떠돌다가 2022년 16살 학생이던 케인 파슨스가 자신의 채널 ‘케인 픽셀스’에 관련 영상 콘텐츠를 창작해 시리즈로 올리며 유튜브를 대표하는 공포 밈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영화는 A24가 파슨스를 직접 감독으로 세우며 그의 유튜브 세계관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풀어냈다. 신출내기에게 과감히 메가폰을 쥐여준 것. 기묘한 공간을 탐험하는 ‘파운드 푸티지’ 영화는 기존에도 있었지만, 기존 시네마 문법 대신 공포감 자체에 무게를 두는 시각적 몰입감 등 직관적인 유튜브 스타일을 이식한 점이 젊은 관객을 극장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다.
공포 영화 ‘옵세션’ 역시 20대 유튜버이자 코미디언 출신인 커리 바커가 메가폰을 잡은 첫 장편 연출작으로 눈길을 끈다. 약 75만 달러의 초저예산 영화로, 지난달 극장 개봉한 이후 전 세계에서 2억 달러가 넘는 티켓 매출을 챙겼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의 소셜미디어 X(옛 트위터)에 ‘백룸’과 함께 거론하며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시장에 눈도장을 찍었다.“하고 싶은 이야기 쓴다”가 비결영화학교를 졸업해 조연출 등 경험을 쌓다가 40대 들어 인정받는 공식을 깨는 흐름은 국내 극장가에서도 관찰된다. 공포영화 ‘살목지’를 선보인 이상민 감독이 대표적이다. 제작비 30억원에 손익분기점 80만명짜리 중소형 영화지만, 지난 4월 개봉해 32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왕과 사는 남자’와 함께 상반기 극장 관람수요 회복을 견인했다.
1995년생인 이 감독은 전문 연출 훈련을 받지 않은 파슨스, 바커와 달리 영화를 전공하긴 했지만, 국내 상업영화 데뷔 루트인 충무로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관성을 벗어난 신세대로 눈길을 끈다. 드라마 보조작가 등으로 활동하며 꾸준히 자신의 시나리오를 만들고, 이를 문화재단·영화제 공모전 등에 피칭하며 기회를 얻었다.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이 작품을 하고 싶어서 만드는 것이지, 단순히 직업으로 하는 게 아니다”라고 밝힌 파슨스처럼 자신의 관심사와 가치관에 부합하는지를 따지는 ‘잘파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 태어난 세대)’ 다운 면모도 강하다. 이 감독은 “첫 장편이라 관객 기대치가 낮을 거라 생각했고, 그게 오히려 과감한 연출의 동력이 됐다”며 “시장에서 말하는 안전한 기획보다는 그저 관객들이 재밌어할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