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가 국내 증시 역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 시가총액을 추월했다. 삼성전자가 약 25년 7개월 동안 지켜온 코스피 시총 1위 자리가 바뀌면서 국내 증시의 권력 지형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SK하이닉스, 26년 만에 시총 1위 등극 22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이날 오후 12시40분 보통주 기준으로 삼성전자 시가총액을 넘어섰다. SK하이닉스는 이날 오전 9시 30분 사상 처음으로 시총 2000조원을 돌파했고 이후 5% 이상 급등하며 상승폭을 확대했다. 이후 오후 12시 40분 SK하이닉스의 시가총액은 2090조원으로 2088조원인 삼성전자를 넘어 시총 1위에 올랐다. SK하이닉스 주가는 6% 상승했지만, 삼성전자 주가는 0.5% 상승세에 그쳤다.
삼성전자가 코스피 시총 1위 자리를 내준 것은 2000년 11월 이후 처음이다. 당시 삼성전자는 SK텔레콤에 일시적으로 시총 1위를 내줬지만 같은 해 11월 21일 정상을 되찾은 뒤 25년 넘게 1위 자리를 유지해왔다.
증권업계는 이번 시총 역전을 단순한 순위 변동 이상의 의미를 갖는 사건으로 평가한다. 과거 스마트폰과 범용 메모리가 국내 증시를 이끌었다면 이제는 인공지능(AI) 반도체가 기업 가치와 시장 흐름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특히 AI 서버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글로벌 선두 지위를 확보하면서 투자자들의 자금이 집중됐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를 비롯한 주요 AI 반도체 기업에 HBM을 공급하며 실적과 기업가치를 빠르게 끌어올렸다. 반면 삼성전자는 범용 메모리 업황 회복의 수혜를 받고 있음에도 모바일, 가전, 파운드리 등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보유하고 있어 반도체 호황 효과가 상대적으로 분산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양사의 시총 격차는 최근 1년 사이 급격히 좁혀졌다. 1년 전만 해도 SK하이닉스 시총은 삼성전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올해 3월 중순 기준 삼성전자 시가총액은 약 1180조원, SK하이닉스는 약 717조원으로 460조원 이상 차이가 났다. 그러나 SK하이닉스가 5월 초 31.1%, 5월 말 20.2%, 6월 셋째 주 28.56%의 주간 수익률을 기록하는 등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며 격차를 빠르게 좁혔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시장 확대가 촉발한 구조적 변화의 결과"라며 "HBM 시장 지배력과 AI 인프라 투자 확대 기대가 SK하이닉스 주가 상승을 이끌었고 AI 투자 열풍이 본격화되면서 두 기업의 시총 격차가 빠르게 축소됐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AI 관련 종목에 대한 투자 쏠림 현상이 과도해질 경우 밸류에이션 부담이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한다. 실제 일부 증권사는 SK하이닉스의 삼성전자 시총 추월이 AI 강세장의 정점 신호가 될 가능성도 있다고 분석하고 있다.'고점 경고' VS 'AI 강세장 시작'... 증권가 의견 엇갈려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 시총을 뛰어넘으면서 국내 증시 대장주 경쟁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시장에서는 이날 예정된 SK하이닉스의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ADR(주식예탁증서) 상장 심사 결과에 주목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3월 ADR 상장을 위한 등록신청서(Form F-1)를 SEC에 비공개 제출했다. 증권가에서는 승인 절차가 순조롭게 진행될 경우 오는 8월 상장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ADR 상장이 성사되면 해외 투자자 접근성이 좋아지고 글로벌 반도체 기업 대비 저평가 해소에도 도움이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현재 SK하이닉스의 12개월 선행 주가수익비율(PER)은 약 6.9~7.8배 수준으로 미국 메모리 반도체 업체 마이크론보다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다.
나스닥과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SOX) 편입 가능성도 거론된다. 미래에셋증권은 ADR 상장 이후 주요 지수 편입이 이뤄질 경우 패시브 자금 유입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글로벌 반도체 펀드들의 편입 수요 확대 역시 주가 재평가 요인으로 꼽힌다.
다만 신주 발행 방식으로 ADR이 추진될 경우 기존 주주가치 희석 우려도 남아 있다. 시장에서는 SK스퀘어의 지분율 유지 등을 고려할 때 전체 발행주식 수의 약 2.5% 범위에서 신주 발행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미래에셋증권은 최대 1780만주 상장을 가정할 경우 공모 규모가 약 28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실적 측면에서는 삼성전자가 여전히 우위다. 올해 연간 컨센서스 기준 삼성전자 영업이익은 약 361조1000억원, SK하이닉스는 약 262조7000억원으로 예상된다. 반면 자기자본이익률(ROE)은 SK하이닉스가 64.54%로 삼성전자(42.14%)를 크게 웃돌아 시장의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증권가에서는 ADR 심사 결과와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 발표가 향후 시총 경쟁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우선주를 포함한 삼성전자 합산 시가총액 기준으로는 약 40조원의 격차가 유지되고 있지만, SK하이닉스가 강한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어 보통주 기준으로는 언제든 역전이 가능한 상황"이라며 "다만 삼성전자 역시 메모리 가격 상승에 힘입어 2분기 실적 개선이 예상되는 만큼 양사의 기업가치 재평가가 본격화될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