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 혁명 이제 시작…장기호황 누리게 될 것"

입력 2026-06-19 18:01
수정 2026-06-20 01:49
‘닷컴 버블’의 막이 오른 1995년 우리나라 반도체(전자집적회로) 수출은 168억달러로 1년 만에 68.4% 늘었다. 반도체 수출을 시작한 1977년 이후 경험한 적 없는 증가율에 우리 경제는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버블이 끝난 2001년 반도체 수출은 112억달러로 주저앉았다. 이후 반도체는 3~4년 주기로 호황과 불황을 반복했다.


인공지능(AI) 대전환의 시대를 맞은 올해는 숫자의 스케일이 과거와 다르다. 지난 1~4월 반도체 수출은 860억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35% 증가했다.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 수출은 695억달러로 217% 늘었다. 낸드플래시 353%(71억달러), D램 273%(288억달러), 고대역폭메모리(HBM) 157%(284억달러) 등 세부 품목의 증가율은 통상적인 업황 회복이라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호황은 반도체에만 머물지 않는다. AI 데이터센터를 구성하는 컴퓨터, 차세대 고성능 저장장치인 SSD, 인프라 통신장비, 전력기기까지 관련 산업 전반에서 이전에 보지 못한 수출 기록이 쏟아지고 있다. 한국 경제가 구조적 전환에 들어섰다는 기대가 커지는 배경이다.

처음에는 구조적 전환처럼 보였지만 경기 순환으로 끝난 사례도 많다. 2000년 닷컴 버블, 2021년 메타버스 붐이 그랬다. 그럼에도 AI 대전환을 증기기관 발명이나 인터넷 확산에 비견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데이터센터와 전력망 구축에 들어가는 투자 규모가 중장기에 걸쳐 천문학적으로 커지고 있고, 이 투자가 단순히 설비 증설에 그치지 않고 경제 전반의 생산성을 끌어올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내 한 반도체 대기업 사장은 “AI 경쟁의 중심이 이미 대규모언어모델(LLM)에서 에이전트 AI로 넘어갔고, 피지컬 AI 시대를 눈앞에 두고 있다”며 “일부 LLM 기업이 경쟁에서 이탈하더라도 ‘AI 거품 붕괴’를 우려하지 않아도 될 만큼 반도체 등 관련 산업 수요는 장기간에 걸쳐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만의 낙관론이 아니다. 글로벌 투자은행(IB)과 자산운용사도 AI를 세계 산업 지형을 장기적으로 바꿔 놓을 힘으로 보고 있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2024년 다섯 가지 구조적인 변화를 ‘메가포스’로 명명하고 AI를 포함시켰는데, 올해 보고서에선 그중 AI가 가장 지배적인 힘이라고 평가했다. 빅테크의 전례 없는 설비 투자가 금리와 물가, 전력 수급, 산업 생산 등 거시 경제를 통째로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블랙록은 이를 ‘마이크로(미시)의 매크로(거시)화’라고 표현했다.

블랙록에 따르면 2023년 2000억달러를 밑돈 빅테크의 투자 규모가 2030년에는 7000억달러로 늘어날 전망이다. 누적 투자액은 3조달러로 예측됐다.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10%에 맞먹는 규모다. JP모간도 ‘2026년 전망: 약속과 압력’ 보고서에서 “과거 주요 기술 혁신기의 투자 규모는 세계 GDP의 2~5%였지만 현재 AI 관련 투자는 1% 수준”이라며 “역사적인 선례에 비춰볼 때 AI 투자 붐이 지금보다 두 배 이상 커질 여력이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은 투자 경쟁을 벌이는 빅테크 중 누가 승자가 되든 상관없이 상당 기간 수혜를 볼 수 있는 포트폴리오를 갖췄다는 평가가 많다. 메모리 부족 현상이 2030년까지 지속될 것이란 최태원 SK 회장의 전망도 같은 맥락이다.

주형환 전 산업통상자원부(현 산업통상부) 장관은 “AI를 계기로 산업뿐 아니라 경제 사회 질서 전반이 바뀌고 있는 지금은 순환적 변동이라기보다 구조적 전환이라고 봐야 한다”며 “이 기회에 AI 기반 산업을 더욱 키우고 경쟁력이 없는 업종은 구조조정하는 산업구조 개편에 성공한다면 상당히 오랜 기간 호황이 지속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정영효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