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2만명의 작은 나라에서 담배의 주성분인 '니코틴'을 마약으로 지정해야 한다는 제안을 유엔에 접수했다.
17일 한국담배규제연구교육센터에 따르면 태평양의 섬나라 팔라우공화국은 지난 10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에게 "니코틴이라는 물질 자체를 국제 마약류 규제 대상으로 검토해 달라"는 공식 통보문을 제출했다.
팔라우는 제주도의 약 4분의 1 크기인 육지 면적과 2만 명 안팎의 인구를 보유한 작은 국가이지만 기후 변화 대응, 해양 생태계 보호 등에 대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번 팔라우의 요청은 1971년 유엔 '정신 약물에 관한 협약(1971년 협약)' 제2조에 근거했다. 개별 담배 제품이 아니라 니코틴이라는 화학물질 자체를 세계보건기구(WHO) 차원의 국제 심사 대상에 올린 사실상 최초의 사례다.
팔라우 정부는 통보문을 통해 '매년 흡연 관련 사망자가 700만 명을 넘는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그 중심에 있는 니코틴이 신경독성을 지닌 강한 의존성 물질임에도 지금까지 국제 약물 통제 체계 밖에 있었다"고 꼬집었다.
현재 WHO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은 일반담배, 가열 담배, 무연 담배 등 제품 단위로 규제를 설계해 왔는데, 니코틴 파우치, 합성 니코틴, 새로운 형태의 전자담배 같은 신종 제품들은 이런 제품 중심 규제망을 비교적 쉽게 비껴갈 수 있다는 게 팔라우 측의 지적이다.
니코틴 물질 자체를 통제하면 어떤 제품이든 같은 규제에 둘 수 있다는 논리다.
실제로 담배에 대한 팔라우 정부의 규제는 강력하다. 입국할 땐 개봉된 담배 1갑만 면세가 허용된다. 전자담배의 반입과 사용은 금지돼 있으며 일반 궐련 담배도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은 엄격히 제한된다.
이번 통보문에는 WHO 약물의존성전문위원회(ECDD)가 니코틴을 평가해 1971년 협약상 등급에 해당하는지 검토해 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ECDD는 △의존 △남용 위험 △공공보건에 대한 위협 △치료적 유용성으로 평가하는데 팔라우는 니코틴이 이를 모두 충족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1971년 협약은 통제 강도에 따라 4단계의 등급을 두고 있으며 어떤 물질을 어느 등급에 둘지 혹은 두지 않을지는 53개 회원국으로 구성돼 순환제로 운영 중인 유엔 마약류위원회(CND)가 3분의 2 이상 찬성으로 결정한다.
니코틴이 등급 분류 대상, 즉 마약으로 인정될 경우 각국 정부는 니코틴의 제조·유통에 대한 허가제 도입, 국경 간 거래 흐름 추적, 비규제 경로로 유통되는 사업자에 대한 단속 권한 등 새로운 국제법적 근거를 갖게 된다고 팔라우 측은 설명했다.
팔라우가 공개한 통보문에 따르면 올 하반기 WHO ECDD는 니코틴에 대한 정밀 심사에 돌입하고, ECDD는 2027년 10월까지 WHO 사무총장에게 등급 분류 권고안을 제출하면 2028년 3월 유엔 CND는 표결에 부칠 전망이다.
이 심사 과정에서 WHO 사무국은 모든 유엔 회원국에 표준 질의서를 배포해 의견과 자료를 제출받을 계획인데, 한국도 이 절차를 통해 공식 의견을 제시할 수 있다.
이성규 한국담배규제연구교육센터장은 "팔라우의 이번 요청은 담배 제품이 얼마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면서 "기존 궐련 중심 정책과 금연 사업만으로는 앞으로 새롭게 등장할 다양한 니코틴 제품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우리라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국제 사회의 변화를 참고해 우리 역시 전자담배 이후 시장에 유입될 새로운 니코틴 제품에 대한 규제와 관리 체계를 선제적으로 마련할 필요가 있다"면서 "보다 포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게 시급한 과제"라고 강조했다.
이보배 한경닷컴 객원기자 newsinf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