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중동 전쟁이 종식되더라도 고유가 흐름이 이어져 소비자물가 오름세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했다. 반도체 기업이 지급하는 막대한 성과급은 수요 측면의 물가를 끌어올릴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시장 일각에서 예상하는 ‘빅스텝’(한 번에 기준금리 0.5%포인트 인상) 가능성에 대해서는 우회적으로 선을 그었다.
신 총재는 17일 한은에서 열린 물가안정목표 운영상황 점검 기자설명회에서 “에너지 공급망이 중동 전쟁 이전 수준으로 정상화하고 국제 유가가 안정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며 “소비자물가도 상당 기간 높은 수준의 상승세를 지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은 이날 보고서를 통해 올해 하반기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 안팎, 근원물가 상승률은 2%대 중후반으로 전망했다. 신 총재는 “누적된 고유가 영향이 에너지뿐 아니라 시차를 두고 다른 품목으로 파급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은이 2000년 이후 고유가 충격이 3개월 이상 지속된 사례를 분석한 결과 유가가 10% 오르면 약 5개월 뒤 근원물가가 0.1%포인트 이상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2022년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당시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났다. 국제 유가는 2022년 6월 배럴당 118달러까지 치솟은 뒤 하락세로 전환했지만 석유류를 제외한 품목의 물가 기여도는 오히려 높아졌다. 국제 유가와 공업 제품, 전기·가스·수도, 외식 제외 서비스 가격 상승률 간 상관계수는 14~18개월의 시차를 두고 정점을 찍었다. 신 총재는 “최근 고환율 역시 유가 상승세를 증폭시키는 이중 효과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신 총재는 특히 반도체 기업의 대규모 성과급이 새로운 물가 자극 요인으로 떠올랐다고 지목했다. 신 총재는 “5월 통화정책방향 회의 당시보다 임금과 수요가 물가를 끌어올리는 힘이 더 강하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한은에 따르면 업계 상위 10% 수준의 성과급을 지급하는 사업체 비중이 높아지면 5개월 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05%포인트 높아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올해 1분기 명목임금 상승률 3.4% 가운데 반도체 업종을 포함한 정보기술(IT) 부문 성과급 기여도는 1.3%포인트에 달했다. 2012∼2025년 명목임금을 끌어올린 여러 임금 항목 가운데 기여도 기준 상위 3%에 해당한다.
한은은 내년 초 IT 업종 상여금의 명목임금 상승률 기여도가 상위 1%를 웃돌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기업의 성과급 확대가 다른 산업의 임금 인상 요구로 이어져 물가 압력이 커질 수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빅스텝 가능성에는 거리를 뒀다. 신 총재는 “빅스텝이 거론됐을 땐 국채 금리와 환율이 많이 오르는 등 시장이 어려운 상황이었다”며 “중앙은행은 시장 상황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경제의 근본적인 흐름을 보면서 통화정책을 펼 것”이라고 말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