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는 행위는 동시대가 마주한 거대한 질문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서로의 감정을 나누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입니다."
뇌과학자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는 전방위 예술 애호가다. 책과 음악, 미술, 연극, 뮤지컬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경험하고 수집한다. 공연장,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 영화관. 그는 어디든 출몰한다.
그는 일찌감치 '예술과 뇌'에 천착했다. 클래식 음악을 듣거나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행위가 인간의 뇌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예술의 효용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데 몰두해왔다. 예술가는 어디서 1%의 영감을 받아 창의성을 발현하는가. 뇌의 가장 고난도 테크닉이 작동하는 찰나를 포착하는 것이 그의 연구다.
화가가 캔버스 위에 자신의 세계를 창조한다면, 그에겐 삶 자체가 캔버스다. 과학자인 그가 일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예술가와 꼭 닮은 이유다. 정재승 교수의 예술을 향한 촉수가 뻗어 있는 내밀한 공간을 찾았다.
○서재, 3만 7000권의 뇌 지도
정재승 교수의 집은 도서관이자 미술관이며 음악감상실이다. 대전 유성구 전원주택단지에 위치한 이 집은 건축가 조민석이 설계했다. 외관은 좌뇌와 우뇌를 상징하듯 대칭형이고, 내부는 그의 머릿속 관심사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술과 골프를 하지 않는 그가 자신을 위해 허락한 럭셔리다. 집 안 곳곳엔 생각에 화력을 더하는 '불쏘시개'들이 배치돼 있다.
책상 앞 모니터의 인공지능 비서가 1초 만에 정보를 쏟아내는 시대. 그의 서재는 약 3만7000권의 종이책으로 가득하다. 책값만 7억원이 넘는다. 어려서부터 텍스트광이었던 그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이라면 다 읽었다. 만화책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재의 네 벽면은 그의 머릿속 굵직한 주제들을 그대로 투영한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로 대표되는 천체물리학,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비롯한 생태학, 아인슈타인으로 대표되는 물리학, 에르빈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등 생명과학이 각 면을 채우고 있다.
서재 한편에 놓인 아인슈타인의 사진은 이 공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그가 프린스턴 고등학술연구소 1호 연구원으로 부임해 어떤 의무도 없이 연구에만 몰두하던 시절을 담았다. 정 교수는 "아무 의무 없이 순수하게 연구에 파고드는 삶을 보여주는 공간"이라며 "모든 학자가 꿈꾸는 공간"이라고 했다.
○동시대 예술감상, 가장 인간적 행위
서재 밖은 예술의 공간이다. 거실의 한쪽 벽면에는 대형 미술 작품 두점이 걸려 있다. 강렬한 색감의 컨템퍼러리 표현주의 작품, 모노톤의 추상주의 작품이 벽을 채웠다.
작품은 주기적으로 교체한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동시대성'이다. 자산 가치나 미술사적 위상보다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예술가들의 시선을 감지하려 애쓴다. 집 안에는 핸드릭 링랄가와 같은 아프리카 작가의 작품부터 직접 주문 제작한 현대 미술품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동시대성이 중요해요.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지금 이 순간의 예술가들을 보고 영감을 받는 데 가치를 둬요." 그는 "마이클 잭슨의 음악에 전율하고,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에 눈물 흘리며, 지구 반대편의 전쟁에 아파하지 않는다면 그 시대를 진정으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며 "동시대를 살며 예술을 함께 경험하고 나누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 행위"라고 했다.
미술 감상은 뇌를 리셋하는 데도 좋다. 특히 메시지가 모호한 추상화를 보면 생각의 관성에 브레이크가 걸린다.
“집에 미술 작품을 걸어두고 주기적으로 바꾸는 게 ‘영감’을 얻기 위한 것만은 아니에요. 삶에서 영감은 딱 1%의 순간이고, 진짜 중요한 건 99%의 시간을 견디는 일이니까요. 이 시간을 버티려면,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는 ‘꾸준한 동기부여(Sustained Motivation)’가 필요해요. 미술 작품들은 제게 정서적으로도 안정감을 주고, 새로운 생각을 펼치게 만들죠."
정 교수가 가장 좋아하는 예술은 연극이다. 동시대성, 우연, 연결, 공감. 그의 연구 키워드가 결집된 장르기 때문. 연극은 찰나의 예술이다. 무대 위에서 화르르 분출하고 동시에 휘발된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지난해에만 89편의 연극을 봤고, 지금도 주 1~2회 공연장을 찾는다. 극을 보고 함께 간 사람들과 감상을 나누는 것도 필수 코스다.
"지하철에서 타인을 2시간 동안 빤히 쳐다보면 불쾌감을 주지만, 극장에서는 배우가 온몸으로 자신을 봐달라고 절규합니다. 숙련된 배우의 섬세한 몸짓을 죄책감 없이 관찰할 수 있는 짜릿함이 연극의 특별함이에요."
○“예술은 새로운 생각을 사는 것"
이렇듯 그의 탐구 대상은 늘 연구실 밖 세상이었다. 천체물리학자를 꿈꾸던 그가 우연한 기회에 뇌과학자가 된 것도 관심의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제 관심은 늘 인간을 향해 뻗어 있었어요. 100년도 못사는 인간의 유한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질문이 저를 뇌과학자로 이끌었습니다.”
정 교수는 동시대성, 연결, 대화, 공감이라는 가치에 몰두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창의적인 산물인 예술이 있다. 그에게 예술이란 "지금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각을 사는 것"의 의미가 강하다.
생각을 확장하기 위한 그의 공간은 타인에게도 활짝 열려있다. TV예능프로그램 ‘집사부일체’에 그의 집을 공개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카이스트 학생들은 때로 그의 서재에서 워크숍을 진행한다. 그는 자신의 서재, 거실, 심지어 옥상의 테라스도 공유한다.
○200년 후를 보는 예술가의 뇌
"인간의 삶은 유한하지만 어떤 예술은 수백 년 이상 사랑받습니다. 인간의 보편적이고 시간을 초월한 ‘공통의 정서’를 담고 있기 때문이에요."
정 교수는 최근 설치미술가 양혜규와의 대화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 "200년 후의 미래 정신으로 현재를 바라봐야 한다"는 작가의 태도였다. 어떤 예술가는 동시대의 반응을 살피지만, 양혜규 같은 작가는 미래의 시선으로 현재를 본다. 200년 뒤 후손들이 지금의 우리를 평가할 때 무엇을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길지 생각한다. 정 교수 역시 "예술가의 거시적 시각으로 현재를 성찰할 때, 인류에게 진짜 도움이 되는 지성을 발견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뜻밖의 우연을 포착하라
인공지능이 인간의 삶, 심지어 뇌도 바꾼다는 요즘, 그는 자신의 뇌를 잘 지키고 활용하며 산다. 이 공간은 그의 뇌가 쉬는 곳이자 영감을 얻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곳이다. 유튜브 대신 종이책을 펼치고 느긋하게 LP판을 플레이한다.
정 교수는 현대인의 조급증과 불안이 소셜미디어에서 기인한다고 진단한다. 전 세계와 나를 실시간으로 비교하며 뇌를 흥분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철저히 이를 멀리한다. 디지털 소음을 끄고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는 것. 그가 남달리 여유로워보이는 이유다.
그는 뛰어난 두뇌는 타고난게 아니라, '우연히 만난 좋은 경험'으로 발달한다고 했다. 그는 "인공지능과 우리의 뇌가 다른 건, 상관없는 것들을 의미로 연결하는 능력"이라며 "세렌디피디, 즉 뜻밖의 사건을 영감의 원천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게 인간 뇌의 탁월함"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정 교수는 늘 우연이 들어올 '공간'을 확보한다. "우연히 읽은 책, 어쩌다 들은 말 한마디가 인생을 뒤바꿉니다. 뇌를 비워두고 뜻밖의 우연이 들어올 공간과 채널을 열어두는 것이 제 삶의 방식입니다."
대전=조민선 기자 sw75j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