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익으로 취업하는 시대 끝났다"…AI가 바꾼 취업 공식 [이미경의 교육지책]

입력 2026-06-03 14:52
수정 2026-06-03 15:13
취업준비생 하영우 씨(26)는 최근 토익 965점 성적표의 유효기간이 만료됐지만 시험에 다시 응시하지 않기로 했다. 토익 성적을 필수로 요구하는 기업이 많지 않은데다 토익스피킹이나 오픽 등 말하기 시험 성적만으로도 충분히 어학 실력을 입증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하 씨는 “예전처럼 토익 고득점이 취업 필수 스펙으로 통하는 분위기는 아닌 것 같다”며 “같은 시간과 비용을 쓴다면 지필 점수를 다시 따는 것보다 실제 업무에서 쓸 수 있는 말하기 실력을 키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AI 확산에 토익 지고 영어 말하기 뜬다인공지능(AI)의 발달로 취업 시장의 ‘필수 스펙’ 지형이 바뀌고 있다. 토익 지필고사처럼 정답을 고르는 시험의 영향력은 약해지는 반면, 말하기 시험과 면접처럼 지원자의 실제 사고력과 현장 대응력을 확인하는 평가는 늘고 있다. 3일 한국경제신문이 구직 플랫폼 캐치에 의뢰해 올해 상반기 이력서 9791건의 어학 자격 등록 현황을 분석한 결과, 영어 어학 성적으로 토익스피킹·오픽 등 말하기 시험을 등록한 비율은 52%로, 지필 토익 등록 비율(48%)을 넘어섰다. 말하기 시험 성적 등록 비율은 2022년 30%에서 2023년 32%, 2024년 39%, 2025년 47%로 매년 높아졌다.

취업 시장에서 토익의 영향력이 줄어든 데는 기업들의 채용 기준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 영어 성적을 필수 지원 조건에서 빼거나 어학 성적을 요구하더라도 지필 토익 대신 오픽·토익스피킹 등 실전 회화 성적만 인정하는 기업이 늘고 있어서다. 올해 10대 그룹의 상반기 채용에서 어학 점수를 필수 자격으로 요구한 곳은 삼성, 현대자동차, LG, 한화, 롯데, 포스코, HD현대, GS 등 8곳이었다. 이 가운데 지필 토익 점수를 인정한 곳은 현대자동차그룹과 LG그룹의 일부 계열사뿐이었다.

기업 인사 담당자들 사이에서는 AI의 확산으로 토익이 평가해온 문법·독해 능력보다 실제 말하기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 대기업 인사팀 관계자는 “영어 이메일이나 서류 작성은 AI로 상당 부분 처리할 수 있다”며 “반면 말하기는 상대방의 반응에 즉각 대응해야 하는 만큼 지원자가 직접 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지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토익 고득점자라도 실제 업무 미팅이나 해외 출장에서 영어로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 말하기 시험 성적을 더 중점적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해외에선 자소서 안 보는 기업도 등장이 같은 흐름은 컴퓨터활용능력 등 사무 자격증 시장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 취업 가산점을 받기 위해 구직자라면 누구나 취득했던 컴퓨터활용능력과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의 수요 급감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산업인력공단과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컴퓨터활용능력 1급 필기시험 접수자는 2021년 50만 6309명에서 지난해 20만 1965명으로 60.1% 넘게 쪼그라들었다. 워드프로세서 필기시험 응시자 역시 2020년 6만7341명에서 2024년 4만9774명으로 26.1% 감소했다.

생성형 AI를 활용해 자기소개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면서 해외에서는 채용 과정에서 자소서를 보지 않는 기업도 등장했다. 일본 통신·IT 대기업인 소프트뱅크는 지난 1월부터 자소서 제출을 폐지했다. 대신 지원자가 제출한 1분짜리 영상을 우선 AI가 분석하고 인사 담당자가 교차 검토한다. 대형 제약사인 로토제약도 신입 채용에서 자소서 기반의 서류 전형을 전면 폐지하고 지원자 전원을 대상으로 15분간 대면 면접을 진행하기로 했다. 국내에서는 올해 에어로케이항공이 항공업계 최초로 ‘자기소개서 없는 채용’을 도입했다. 채용 과정에서는 지원자의 경험과 활동 이력을 담은 ‘경험 포트폴리오’를 제출받아 면접 과정에서 진위 여부와 직무 연관성을 심층 검증하기로 했다.

전문가들은 그동안 정량적 스펙이 증명해 온 독해·문서 작성 등의 능력을 AI가 상당 부분 대신할 수 있게 된 만큼, 취업 시장의 평가 기준이 ‘스펙’에서 ‘실제 수행 역량’으로 더욱 빠르게 옮겨갈 것으로 내다봤다. 박지성 충남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들이 소통 능력 등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 고유의 능력을 평가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며 “구직자가 실제 상황에서 마주한 문제를 협업을 통해 어떻게 해결했는지 확인하려는 ‘경험 검증’ 추세가 강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류 전형 비중은 줄고 면접이 확대될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이미경 기자 capit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