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봐도 저게 왜 국보인지 과문한 나는 이해가 안 된다. 일본 국보 25호 이도다완, 다성(茶聖) 센노 리큐가 ‘천하제일’이라고 극찬해 다도의 상징이 된 그 물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애장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빼앗아 대대로 소장했다. 경상남도의 서민용 그릇을 굽던 가마에서 제작된 그 물건은 막걸리 사발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건 또 왜 국보인지 이해가 안 되는 국보 26호 ‘시바타이도’도 그 근처에서 만들어졌고, 어찌하다 일본까지 흘러가 오다 노부나가의 사랑을 받았다. 현재 가치로 1000억원이 훌쩍 넘어간다는 그 작품의 작가는 오리무중이다. 그런 대가들에 대한 처우는 어떠했을까. 그 시절 관요의 장인들은 ‘노비’였다. 탁월한 실력을 보이면 면천의 기회를 줘 평민으로 승격(?)해 주는 은혜를 베풀었다 하니 자식까지 이어지는 노비 딱지를 떼려고 죽자고 열심히 일한 걸까.
그런 명품을 막걸리 사발로 쓰는 배포 큰 동네, 탐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임진왜란은 도자기 전쟁으로도 불린다. 장인들은 무조건 일본으로 끌려갔다. 학자에 따르면 2만 명에서 10만 명이 끌려갔는데 조선의 귀환 노력에도 7500명 정도만 돌아왔다. 아니 돌아오지 않으려 한 것이 맞을 수 있다. 일본은 잡혀온 그 장인들에게 사무라이 계급을 내려줬다. 벼락출세! 자기들끼리 모여 살게 해줬고 사업 비용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조선으로 돌아갈 이유, 별로 없었다. 그 도공들에게 주어진 인정과 자유는 불모지였던 일본의 도자기산업을 폭발적으로 발전시켰다. 그때부터 메이지유신 전까지 수출로 벌어들인 돈의 90%가 도자기에서 나왔다는 주장도 있으니 알 만하다. 18세기 유럽 사회를 뒤흔든 ‘자포니즘’이라는 일본 문화 열풍의 중심에 그 도자기가 존재했다. 그렇게 벌어들인 돈이 신무기 구입과 근대화 자금으로 쓰였고 다시 조선을 침략하는 기반이 됐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오려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도공을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라고 욕할 수 있을까?
첨단 정보기술(IT) 제품에 필수적인 절연체 파인세라믹. 교세라(교토세라믹)가 개발했고 세계 1위를 굳건하게 유지하고 있다.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가 조선 도공들이 살던 교토에서 그들의 기술을 응용해 개발했다. 1959년 창업 이후 단 한 번의 적자 없이 성장했다. 그 이나모리가 매년 한국을 방문했다. 아내가 ‘한국 근대농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장춘의 딸이어서 장인의 기일마다 묘소를 찾아와 참배한 것이다. ‘씨 없는 수박’으로 잘못 알려진 우장춘은 민비를 시해하는 데 앞장선 조선군 장교 우범선의 아들이다. 일본으로 망명한 우범선이 암살당한 뒤 어렵게 자랐지만 결국 일본 최고의 농학자가 됐다. 하지만 아버지의 과오를 갚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평생 ‘우’씨 성을 고집했다.
해방 후 일본은 그를 보내주기 싫어 감옥에 가두려는 꼼수까지 부렸지만 자기 발로 조선인 강제수용소로 탈출(?)한 뒤 한국에서 보내 준 신분증으로 송환선에 탑승했다. 한국 정부는 현재 가치로 30억원에 달하는 비용을 보내줬는데 전액을 한국에 필요한 종자 구매에 사용했다. 그는 한국에서 엄청난 성과를 남겼지만 정부는 그가 일본으로 다시 갈까 노심초사했다. 그래서 모친의 사망 소식에도 여권을 내주지 않아 장례에 참석하지 못했다. 향년 61세, 사망 직전에 대한민국 문화포장이 수여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드디어 조국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알아주시지”라고 했다는데, 우리는 자기 발로 돌아온 사람도 그렇게 푸대접했다.
그래서 지금의 우리는 조금이라도 바뀐 게 있을까? 세계 최고의 반도체와 숱한 첨단제품을 척척 만들어내는, 중국과 미국이 호시탐탐 노리는 그 엔지니어들에 대한 존중은 합당한 수준인가. 파업을 도모했다며 그 엔지니어들에게 화만 낼 게 아니라 깊이 생각해 볼 대목이 여럿 있다. 세월이 흐르고 후손은 세계가 탐내는 저 반도체를 우리 시대가 남긴 국보라고 생각할 게 뻔한데 여전히 의대와 로스쿨이 공대를 압도하는, 그러면서 여전히 ‘공돌이’라고 낮춰보며 대가 없는 애국심만 강요하는 사농공상의 질긴 덫에 갇혀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