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미국 인공지능(AI) 로봇기업 피규어AI가 공개한 휴머노이드 ‘피규어03’의 실시간 택배 분류 실험은 세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신장 173㎝, 무게 60㎏의 로봇은 인간 개입 없이 택배물에 붙은 바코드를 식별해 정렬하는 반복 업무를 능숙하게 했다. 동일 사양 로봇 3대가 교대로 투입돼 200시간 연속으로 처리한 택배 물량은 24만9560개. 실험 도중 치러진 인간 작업자와의 10시간 맞대결에선 192개 차이로 아쉽게 패했다. 브렛 애드콕 피규어AI 최고경영자(CEO)는 X에 “인간이 이기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것”이라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남겼다.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대결은 흥미로웠지만 실험의 본질은 승패가 아니었다. 이번 시도는 휴머노이드가 실험실을 넘어 산업 현장에 본격 투입될 가능성을 입증한 상징적 사건이다. 기존 산업용 로봇은 생산 효율을 위해 공장 라인 전체를 새로 설계하고 개조해야 했다. 휴머노이드는 다르다. 인간 신체를 본떠 설계돼 기존 작업 공간을 그대로 활용할 수 있다. 사람이 일하던 자리에 로봇이 교대 근무자처럼 투입되는 시대가 성큼 다가온 것이다. 공장 전체가 24시간 자율 가동돼 조명조차 필요 없는 ‘다크 팩토리’는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AI 기술 발전과 맞물린 휴머노이드 진화는 산업 사회를 지탱한 인간 노동 중심의 경제 질서가 전환기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숙련 노동자 한 명을 양성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했다. 그러나 AI 휴머노이드는 인간의 작업 과정을 신경망으로 학습한다. 한 대의 로봇이 기술을 익히면 그 경험은 곧 데이터가 되고, 네트워크를 통해 수만 대의 로봇에 즉시 공유된다. 평생에 걸쳐 축적한 인간의 노하우가 로봇에는 클릭 한 번으로 배포되는 소프트웨어에 불과한 셈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생산과 고용, 나아가 분배 문제까지 다시 설계해야 하는 거대한 경제적 변곡점이 될 수 있다.
글로벌 기업들은 휴머노이드가 제조 현장의 핵심 노동력으로 자리잡을 미래를 전제로 치열한 기술 경쟁을 벌이고 있다. 휴머노이드 상용화의 분수령은 2028년 전후다. 테슬라는 이르면 올해 3세대 ‘옵티머스’를 공개하고 2027년 하반기 이후 본격 생산에 나설 계획이다. 휴머노이드가 다른 휴머노이드를 생산하는 공장 구축이 기본 구상이다. 현대자동차그룹의 로봇 자회사 보스턴다이내믹스는 2028년 이후 미국 조지아 공장에 2만5000대 이상의 ‘아틀라스’를 투입할 계획이다.
휴머노이드 기술은 미래 제조업 패권을 가를 승부처다. 숙련 노동자의 노하우를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하고, 기존 생산라인에 곧바로 투입할 수 있는 로봇 생태계를 구축한 국가가 글로벌 공급망 경쟁의 주도권을 쥘 가능성이 크다. 특히 저출생과 고령화 문제에 직면한 국가들에 휴머노이드는 노동력 부족을 보완할 전략 자산이다. 다행히 우리에겐 기회가 있다. 휴머노이드산업의 핵심인 배터리, 액추에이터(구동기), AI 반도체 등 하드웨어 제조 역량 측면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국가는 세계에서 한국과 중국 정도가 꼽힌다.
이젠 개별 기업 중심의 경쟁 전략에서 벗어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아우르는 국가 차원의 생태계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제조업을 기반으로 성장해 온 만큼 생산성 혁명 시대를 열 휴머노이드를 주권 산업으로 인식하고 육성해야 한다. 지난 반세기 산업화를 이끈 반도체처럼 휴머노이드는 한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좌우할 전략 산업이 될 것이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다. ‘휴머노이드 모멘트’에서 뒤처지면 K제조업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