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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원전 시장이 다시 열리고 있다. 과거 원전은 안전성, 폐기물, 규제 리스크를 중심으로 논의됐지만, 최근의 원전은 전력 인프라와 산업 안보의 문제로 다시 해석되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확산과 제조업 리쇼어링, 전기화 수요 확대가 동시에 진행되면서 미국은 안정적이고 대규모의 전력원을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책 환경도 이 흐름을 뒷받침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IRA를 통해 원전을 청정에너지 체계 안으로 편입했다면,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원전을 에너지 안보와 산업 경쟁력의 핵심 인프라로 격상시키고 있다. 원전 규제 개혁, 차세대 원자로 배치, 공급망 강화, 인허가 절차 단축이 동시에 추진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책의 초점은 단순히 기존 원전을 유지하는 데 있지 않다. 신규 원전과 SMR을 포함한 새로운 원전 건설 사이클을 열겠다는 데 있다.
?최근 미국 에너지부의 보조금 지급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미국 에너지부는 2026년 5월 Gen III+ SMR 조기 배치를 위해 8개 미국 기업에 총 9,400만 달러 이상의 비용분담형 자금을 배정했다. 이는 미국 원전 정책이 선언적 구호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 배치와 착공을 준비하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원전 확대가 정책 언어에서 실행 예산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민간 수요도 빠르게 붙고 있다. 아마존, 구글,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은 데이터센터 전력 확보를 위해 원전과 장기 전력구매계약을 체결하거나 SMR 개발 협력에 나서고 있다. 데이터센터는 24시간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필요하고, 동시에 탄소 배출 감축 압력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 원전은 이 두 조건을 동시에 충족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전원이다. 여기에 주정부와 TVA 같은 공공전력기관까지 원전 수명 연장과 신규 원전 도입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원전은 정부와 민간이 함께 선택하는 전력 인프라로 다시 자리 잡고 있다.
표 1. 트럼프 행정부 집권 이후 원전 관련 정책
?다만 미국 원전 확대의 병목은 공급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누가 실제로 원전을 지을 수 있느냐의 문제다. 미국은 여전히 세계 최대 원전 운영국이지만, 신규 원전을 건설할 수 있는 산업 기반은 과거와 같지 않다. 현재 가동 중인 원전의 상당수는 1990년 이전에 건설됐고, 1996년 Watts Bar 1호기 이후 2023년 Vogtle 3호기 가동 전까지 신규 원전 건설은 사실상 장기간 중단되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설계, 시공, 품질관리, 프로젝트 통합관리 역량은 약화됐고, 원전 EPC 생태계도 크게 축소됐다.
Vogtle 3·4호기는 이러한 공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약 30년 만에 재개된 미국의 대형 원전 프로젝트였지만, 사업비는 초기 추정치를 크게 넘어섰고 상업운전도 계획보다 장기간 지연됐다. 문제는 설계 변경, 모듈 제작 품질 문제, 현장 재작업, 품질 통제 실패, 프로젝트 관리 미흡이 복합적으로 나타났다. 미국이 실제 현장에서 원전을 정해진 일정과 예산 안에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이 확인된 셈이다.
원전 건설에서 시간은 곧 비용이다. 원전은 착공부터 상업운전까지 장기간이 소요되는 초대형 프로젝트이고, 공기가 길어질수록 건설 기간 중 이자비용은 빠르게 늘어난다. 따라서 원전 EPC의 경쟁력은 시공 단가를 포함하여, 공정 통제력, 품질관리, 프로젝트 통합관리 능력에서 결정된다. 특히 미국처럼 장기간 신규 원전 건설 공백을 겪은 시장에서는 설계도 중요하지만, 설계를 실제 현장에서 구현하고 끝까지 완성할 수 있는 실행 역량이 더 큰 변수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표 3. Vogtle 3/4호기 프로젝트 주요 타임라인
?원전 확대를 위해서는 결국 부족한 건설 역량을 외부에서 보완해야 한다. 다만 원전은 일반 발전소나 산업 플랜트와는 성격이 다르다. 원전은 전력 공급뿐 아니라 국가 안보, 핵연료 관리, 규제 체계, 장기 운영 안정성과 연결되는 전략 인프라다. 따라서 미국이 신규 원전 건설을 확대하더라도 공급망을 단순히 비용이 낮은 국가나 기업에 개방하기는 어렵다.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있으며 규제와 품질 기준을 함께 맞출 수 있는 파트너가 필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조건은 최근의 실제 수행 경험이다. 원전 건설은 과거에 지어본 경험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장기간 신규 건설이 중단되면 인력, 협력업체, 품질관리 체계, 현장 통합관리 역량이 함께 약화된다. 미국의 Vogtle 사례가 보여준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설계와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도, 이를 현장에서 반복 가능하게 구현하는 능력이 약해지면 공기 지연과 비용 초과를 피하기 어렵다. 결국 미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한 설계 파트너가 아니라, 최근 대형 원전 프로젝트를 실제로 완공해본 EPC 역량이다.
이 기준에서 보면 미국 원전 확대 과정에서 동맹국 EPC의 전략적 가치는 자연스럽게 커질 수밖에 없다. 미국이 자국 내 역량만으로 모든 신규 원전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고, 동시에 비동맹국에 핵심 인프라를 맡기기도 어렵다면 선택지는 좁아진다. 정치적 신뢰, 최근 대형 원전 수행 경험, 장기간 프로젝트 리스크를 버틸 수 있는 재무 체력, 그리고 엄격한 원전 품질 기준을 충족할 수 있는 현장 관리 능력을 동시에 갖춘 EPC가 필요하다.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후보군은 한국 원전 EPC라 판단하며, 미국 원전 르네상스의 실행 가능성을 좌우하는 핵심 축으로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표 4. 국가별 신규 원전 건설 비용
조정현 IBK투자증권 건설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