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 의상연구소 후원을 목적으로 열리는 ‘멧 갈라(Met Gala)’는 ‘패션계의 오스카(미국 아카데미 영화상)’로 불린다. 티켓 한 장에 10만달러(약 1억5000만원)가 넘지만 엔터·스포츠 아이콘부터 재계 거물까지 줄을 선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속 미란다의 실제 모델인 미국 보그지의 애나 윈터 편집장이 1995년부터 총괄해오고 있다.
지난 4일 열린 올해 멧 갈라에서 눈에 띈 장면 중 하나는 프라다 드레스를 입은 K팝 그룹 에스파 멤버 카리나의 등장이었다. ‘패션은 예술(Fashion is Art)’이라는 드레스코드에 맞춰 프라다는 한복에서 영감받은 케이프를 구상했다.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가 K팝 스타를 활용해 K컬처를 차용한 의상을 선보인 것. 글로벌 주류문화로 자리매김한 K컬처의 존재감이 패션으로 확장된 사례다.K팝 팬덤·소셜미디어 … 달라진 패션쇼글로벌 패션산업 지형도는 K콘텐츠를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고 있다. 미국 보그는 지난달 ‘슈퍼팬 경제’를 조명하면서 “대형 패션쇼 현장은 풍선과 피켓을 든 팬들이 브랜드 앰배서더가 된 아이돌을 보기 위해 몰려든다”고 썼다.
과거 럭셔리 브랜드 디자이너와 패션지 편집장이 트렌드를 만들고 백화점이 부티크를 중심으로 디자인이 유통됐다면, 이제는 글로벌 팬덤을 지닌 K팝 스타가 실시간 소셜미디어로 소비 흐름을 움직인다는 얘기다. 제니(샤넬), 지수(디올), 로제(생로랑), 리사(루이비통) 등 블랙핑크 멤버 전원이 올해 멧 갈라에 초청받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빅테크 최고경영자(CEO)들의 등장으로도 변화를 읽을 수 있다.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 부부와 마크 저커버그 메타 CEO, 세르게이 브린 구글 공동창업자 등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디언에 따르면 오픈AI와 메타, 스냅이 올해 멧 갈라 테이블 구매에만 적어도 35만달러(약 5억원)씩 지출했다. 빅테크도 패션을 광고와 커머스, 팬덤 경제를 연결해 수익을 내는 블루오션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흐름은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에도 새로운 기회를 열고 있다. 유명 백화점이나 편집숍 등을 통하지 않고도 K팝 스타를 활용해 해외 소비자와 만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고 있어서다. 트렌드리서치에 따르면 국내 디자이너패션 산업 규모는 약 1조3571억원(2023년 기준)으로,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10곳 중 4곳이 해외 진출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젠틀몬스터, 마뗑킴, 김해김 같은 브랜드가 대표적. 이 중 한국 전통 장식예술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김해김의 디자이너 김인태 대표는 프랑스파리의상조합(FHCM) 정회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지속 가능한 K패션 경쟁력이 과제패션을 문화산업으로 접근해 신진 디자이너 액셀러레이팅에 집중하는 오랜 정책 지원도 효과를 보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글로벌 패션위크와 연계한 ‘컨셉코리아’ 사업이 대표적이다. 2010년 뉴욕 패션위크에서 선보인 이후 2024년 파리 패션위크로 옮겨 국내 우수 디자이너를 소개하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했다. 김해김을 비롯해 2019년 론칭한 리이(RE RHEE), 2020년 론칭한 본봄이 지난 3월 파리 현대미술관인 팔레 드 도쿄에서 신규 컬렉션을 선보이기도 했다.
콘진원은 브랜드당 4억원을 편성해 도시 제한 없이 국내 브랜드의 글로벌 패션위크 진출을 돕고 해외 단독 패션쇼 개최를 지원하는 ‘위드 컨셉코리아’ 사업을 최근 개편했다. 단발성 지원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K패션 육성에 나서면서 K팝, K게임, K드라마 등 다른 장르 콘텐츠와 연계해 중소 브랜드의 해외 진출도 모색하고 있다. 유현석 콘진원 원장직무대행은 “K패션은 단순한 의류산업의 틀을 깨고 세계가 즐기는 독창적인 문화와 콘텐츠로서 글로벌 무대의 중심에 서고 있다”며 “글로벌 패션 거점에서 K컬처와 연계한 브랜딩을 강화하는 동시에 인프라가 부족한 소규모 브랜드의 진출 장벽을 낮추는 데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승목 기자
공동 기획: 한국경제신문·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