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더 주려면 ‘계약직’으로”…최태원은 어떻게 반도체 질서를 바꿨나

입력 2026-05-28 13:22
수정 2026-05-28 15:15
[비즈니스 포커스]




요즘 반도체 업계에선 “SK하이닉스가 인재 시장을 흔들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올해 초 헤드헌터 업계에서 돌던 얘기다. AI 반도체 시장이 급팽창하면서 경쟁 축도 공장에서 사람으로 이동하고 있다.

HBM(고대역폭메모리) 경쟁에선 결국 핵심 엔지니어 역량이 공급망 지위를 좌우한다는 평가가 나온다. 업계에선 이 흐름을 가장 먼저 읽은 인물로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꼽는다. 그는 직원을 조직 자원이 아닌 시장형 인재로 바라본 드문 제조업 총수였다.

SK하이닉스 실적 곡선은 최근 5년 사이 극단적으로 움직였다. 2021년 영업이익 12조4103억원에서 2022년 7조66억원으로 줄었고 2023년엔 7조7303억원 적자를 냈다. 메모리 다운사이클 직격탄이었다. 분위기는 1년 만에 뒤집혔다.

AI 수요가 폭발하면서 2024년 영업이익은 16조6217억원으로 반등했고 2025년엔 47조2063억원으로 역대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HBM 시장을 선점한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현재 글로벌 HBM 시장점유율은 50~60% 수준으로 추정된다. 엔비디아 AI 가속기에 들어가는 HBM3·HBM3E 공급 비중도 압도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영업이익 따라 움직이는 성과급…“극한 경쟁에도 안 떠난다”

실적 변화는 곧바로 보상 체계로 이어졌다.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의 10%를 성과급 재원으로 활용하는 구조다. 업황이 좋아지면 직원 보상도 함께 커진다. 업계 관계자는 “실적과 보상이 직접 연결된다는 인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인재 시장 분위기도 달라졌다. 인크루트의 ‘2025 대학생이 일하고 싶은 기업’ 조사에서 SK하이닉스는 처음으로 1위에 올랐다. 공학·전자 계열 선호도가 특히 높았다. 조직 분위기도 바뀌었다. 과거엔 높은 업무 강도로 퇴사 사례가 적지 않았지만 최근 이·퇴직률은 빠르게 낮아지고 있다.

리더스인덱스에 따르면 SK하이닉스 이·퇴직률은 2024년 1%대 초반까지 떨어졌다. 업계에선 “극한 경쟁 구조인데도 사람은 떠나지 않는 회사가 됐다”고 입을 모았다.

최근 방송된 KBS ‘다큐멘터리 3일’ SK하이닉스 이천 캠퍼스 편 역시 온라인에서 화제가 됐다. 직원들의 밝은 조직 분위기를 두고 “성과와 보상이 분위기까지 바꿨다”는 반응이 나왔다.




행복을 말한 총수…최태원의 언어는 왜 달랐나

최태원이 즐겨 쓰는 단어 중 하나는 ‘서든데스(Sudden Death)’다.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면 기업이 순식간에 도태된다는 의미다. 이 논리는 자연스럽게 조직 안정보다 개인 역량 중심 사고로 이어졌다. 평생 고용을 약속하는 건 의미 없고 대신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인재로 만들어줘야 한다는 논리다.

재계에선 이런 철학 배경에 반복된 위기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최태원은 IMF 이후 구조조정 국면, 2003년 SK글로벌 사태, 소버린 경영권 분쟁, 사법 리스크 등을 거치며 ‘조직은 영원하지 않다’는 현실을 체감한 것으로 보인다. 2012년 하이닉스 인수 역시 단순 설비 확보보다 엔지니어 조직 자체를 사들인 결정에 가까웠다는 평가가 많다.

재계 관계자는 “최태원은 제조업 총수지만 사람을 보는 방식은 실리콘밸리 투자자에 가까웠다”며 “회사보다 개인 경쟁력이 중요해지는 시대를 남들보다 먼저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그의 경영 언어도 독특했다. 다른 재벌 총수들이 혁신·위기·1등을 말할 때 최태원은 ‘행복’을 말했다. 2007년 회장 취임 이후 ‘구성원 행복’을 전면에 내세웠고 2018년엔 사회적 가치(SV) 경영을 선언했다. 재계에선 낯선 접근이었다.

30년 가까이 재계를 취재한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행복을 경영 화두로 내세운 첫 총수”라는 평가가 나왔다. 다만 그가 말한 행복은 보호에 가까운 개념이 아니었다.

SK는 연봉 협상제, 자율 출퇴근, 직급 간소화 등을 빠르게 도입했다. 자율성을 확대하는 대신 성과 책임도 함께 키우는 구조였다. 조직 충성보다 시장 가치가 중요해지는 흐름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기업이기도 했다.







“‘계약직’이 인재에 돈 더 주는 유일한 방법”

지난해 최태원은 삼프로TV에 출연해 “인재에게 돈을 더 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계약직 전환”이라고 말했다. 한국 제조업에서 계약직은 오랫동안 비정규직과 하청의 의미에 가까웠다. 최태원은 이 개념을 정반대로 뒤집었다. 핵심 인재와 개별 계약을 맺고 시장 수준의 보상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는 “특별한 인재라는 점을 조직 안에서 인정하면 다른 직원들도 그 보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직 안에 시장을 만들겠다는 의미에 가까웠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은 일찌감치 직원을 조직 부속품보다 거래할 수 있는 인재 자산으로 봤다”며 “그래서 SK가 다른 제조업 대기업보다 빠르게 성과 중심 보상 구조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SK하이닉스 성과급 체계는 제조업보다는 투자은행식 보너스 구조에 더 가깝다. 영업이익이 늘어나면 성과급 재원도 함께 커진다. 상한선 역시 사실상 크게 완화했다. 업계에서는 SK 방식이 제조업 안에 ‘월가식 보상체계’를 들여온 첫 사례라고 본다.

이 철학은 실리콘밸리 방식과도 닮았다. 링크트인 창업자 리드 호프먼은 저서 ‘얼라이언스’에서 “직원과 회사 관계는 평생 고용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맹”이라고 정의했다. 최태원은 한국 제조업 총수 가운데 가장 먼저 이 논리를 경영에 적용한 경영자였다.




‘언더도그’의 역습…HBM 시대와 SUPEX 철학

SK하이닉스는 오랫동안 ‘만년 2위’ 이미지가 강했다. 메모리 시장에서 삼성전자 뒤를 따라가는 회사라는 인식이었다. 판을 뒤집은 건 HBM이었다. 2021년 최태원은 실리콘밸리로 날아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를 직접 만났다.

당시 업계에선 최태원의 AI 반도체 투자를 두고 “메모리 업황도 안 좋은데 무리한 베팅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결과는 달랐다. AI 시장이 폭발했고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 공급망 핵심 기업으로 올라섰다.

올해 1분기 SK하이닉스는 영업이익률 72%를 기록했다. 엔비디아와 TSMC를 넘어 글로벌 주요 반도체·빅테크 기업 가운데 최고 수준 수익성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업계에선 “HBM은 제조업이면서 동시에 실리콘밸리 산업”이라는 말이 나온다. 고객 요구에 맞춰 얼마나 빠르게 대응하느냐가 핵심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SK 특유의 SUPEX(Super Excellent Level) 철학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인간이 도달 가능한 최고 수준을 넘어서는 초성과를 의미한다. 최종현 선대회장 시절 시작된 개념이지만 최태원 체제에선 핵심 인재 중심 체제로 다시 읽히고 있다.

평균을 끌어올리는 게 아니라 상위권 성과를 극대화하는 구조다. 한 반도체 애널리스트는 “HBM 시대는 관료조직보다 핵심 인재 중심 조직이 유리하다”며 “SK는 그 방향으로 가장 빨리 움직인 회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면엔 새로운 위계가 생겼다. 직장인 커뮤니티에선 그룹 계열사를 ‘하이닉스·미들닉스·로우닉스’로 나누는 자조 섞인 표현까지 나온다. 성과급 격차가 수억원 단위로 벌어지면서 같은 그룹 안에서도 위화감이 커졌다는 얘기다.

한 SK 계열사 직원은 “행복 경영이라고 하지만 결국 성과 낸 조직만 행복한 구조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고 했다.

최태원이 말한 행복은 결과적으로 상위 인재 중심 행복으로 수렴됐다는 비판도 나온다. 자율과 성과 공유를 강조했지만 시장 논리가 강해질수록 핵심 인재와 일반 조직 간 격차 역시 커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최근 제조업 현장에선 ‘영업이익 N% 성과급’ 요구가 조선·자동차·바이오·통신업계까지 확산하고 있다. 대만 TSMC 내부에서도 한국 반도체 노조 사례를 언급하며 성과급 불만이 제기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 다른 산업 현장에서도 반도체 업계 수준의 성과급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며 “기업 간, 산업 간 비교가 강해지면서 보상 체계 변화 압력도 더 커질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HBM 경쟁이 본격화되면서 반도체 업계 분위기도 달라졌다. 이제는 공정 장비보다 엔지니어 확보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 굳어지고 있다. SK하이닉스의 급부상 역시 결국 사람 경쟁력에서 나온 결과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경제학계에선 “SK식 성과 체계는 제조업의 금융화에 가깝다”는 평가도 나온다. 핵심 인재 확보엔 효과적이지만 장기적 조직 결속까지 유지할 수 있느냐는 별개 문제다. 이 교수는 “성과 보상 강화는 핵심 인재 유출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측면도 있지만 산업 간 격차와 조직 내 위화감을 키울 가능성도 있다”며 “장기적으로는 이런 구조를 어떻게 감당하고 균형을 맞출지가 중요한 과제가 될 것”이라고 했다.

업계 안팎에선 결국 HBM 초호황 이후에도 지금 같은 보상 체계가 유지될 수 있을지를 주목하고 있다. 메모리 업황이 꺾였을 때도 같은 철학이 작동하느냐다.

최태원이 바꾼 건 단순한 성과급 제도만이 아니라 질서 자체를 바꿨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다만 그 실험이 불황 국면에서도 유효할지는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