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14명 키운 '평생 무주택자'…월세 내다가 파산한 비극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입력 2026-05-23 06:27
수정 2026-05-23 06:55

네덜란드 출신 화가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빛의 거장' 렘브란트입니다. 그 다음은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그린 베르메르(페르메이르)입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여기에 한 명을 더 추가해 '17세기 3대 거장'이라고 부릅니다. 나머지 한 사람이 바로 프란스 할스(1582~1666)입니다.

그는 평생 초상화만 그렸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초상화를 두고 “그림 속 모델이 살아서 숨을 쉰다”고 칭찬했습니다. 유명인들은 할스에게 초상화를 맡기기 위해 길게 줄을 섰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을 비롯한 후배 작가들도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반 고흐는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일부러 그가 살았던 도시까지 찾아갔고, 거칠지만 생동감 넘치는 붓질에 감동해 동생과 친구에게 각각 긴 편지를 썼지요.

그만큼 잘나가는 화가였다면 당연히 풍족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할스는 가난했습니다. 평생 셋방을 옮겨 다녔고, 70대에는 빚을 갚지 못해 살림이 압류되는 굴욕도 겪었습니다. 노년에는 아예 빈민층으로 분류돼 토탄(난방용 연료)을 공짜로 받아 겨울을 겨우 났습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할스가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84년 인생을 따라가 봅니다. 좋은 사람, 할스할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별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렘브란트나 루벤스처럼 같은 시기 활동한 다른 거장들에 대한 기록과 비교해도 이상할 정도로 적은 편입니다. 그래서 할스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내려면, 그가 그린 얼굴들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할스의 작품, 이때까지 미술사학자들이 쌓은 연구, 합리적인 추정을 바탕으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먼저 출생 기록부터. 할스는 철저한 서민 출신이었습니다. 1582년 안트베르펜(지금의 벨기에)에서 태어난 그는 세 살이던 1585년 가족과 함께 전쟁을 피해 피란을 갔습니다. 정착한 곳은 암스테르담에서 약 17km 떨어진 도시 하를럼이었지요. 피난민이었기에 집안은 가난했습니다. 이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할스가 글을 배우지 못했다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할스가 남긴 일기나 편지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그의 성격에 대한 기록은 딱 한 줄 남아 있습니다. 독일에서 온 화가가 남긴 것입니다. “젊은 시절 활기찼다.” 실제로 그는 여러 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627년 작 ‘성 게오르크 시민군 장교들의 연회’를 보면 할스가 사교적인 성격이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할스는 1612년부터 12년 동안 하를럼 시민군에 편성돼 군사 훈련을 받았습니다. 직업 군인은 아니고, 지금으로 치면 예비군 훈련을 정기적으로 받은 것입니다. 이 초상화는 바로 그 부대의 동료들을 그린 것입니다. 그전까지 대부분의 단체 초상화에서는 굳은 표정과 자세의 사람들을 일렬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할스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잔을 들고 웃고 옆 사람과 떠들고 있습니다. 마치 이 사람들의 식사 자리를 잠깐 엿보는 것 같지요. 할스가 자기 동료들과 친했기 때문에, 모임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그림이었을 겁니다.

그는 아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1620년 작 '유모와 카타리나 호프트'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 다른 화가들은 어린이를 '작은 어른'으로 그렸습니다. 굳은 얼굴에 정자세를 한 어색한 모습이었지요. 하지만 할스는 한 살배기 아기가 캔버스 정면을 보며 활짝 웃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아기가 유모를 손으로 살짝 밀어내고 있습니다. 아기가 어른에게 안겼을 때 종종 하는 몸짓입니다. 아기를 좋아하고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이런 모습은 묘사할 수 없습니다.


할스의 초상화 속 얼굴들이 다른 화가과 달리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할스가 작업실에서 먼저 웃으며 분위기를 풀어줬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증명사진이나 프로필 사진을 찍어보셨다면 알 수 있습니다. 긴장하면 사진을 아무리 잘 보정해도 긴장한 티가 납니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으려면 화가(사진사)가 먼저 분위기를 풀어줘야 합니다. 할스는 사람들과 잘 어울렸고, 의뢰인을 친구로 만들었고, 갓난아기를 어를 줄 알았습니다. 좋은 사람이었다는 얘깁니다. 인상파보다 200년 빨랐다할스가 왜 렘브란트, 베르메르와 동급의 거장 취급을 받는지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습니다. 잘 모르는 옛날 서양사람들의 얼굴만 봐서는 체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요.


그가 높은 평가를 받는 가장 큰 이유는 붓질입니다. 1628년경 그린 '유쾌한 술꾼'을 보겠습니다. 한 남자가 와인 잔을 들고 캔버스를 비스듬히 바라보며 막 웃기 시작합니다. 가까이서 보면 얼굴도, 옷도 정밀하게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거친 붓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그런데 한 발 뒤로 물러나면 그 거친 자국들이 갑자기 살아 있는 한 남자의 옷이 되고, 손이 되고, 표정이 됩니다. 같은 시대 다른 초상화와 비교하면 생동감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당시 초상화의 정석은 표면을 매끈하게 마감하는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할스는 붓질의 흔적을 일부러 남겼습니다. 형태를 매끄러운 마무리로 가두지 않고 움직임과 모델의 생기를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붓질은 보는 사람의 머릿속에서 재조합되며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이는 200년 뒤 인상파가 일상의 풍경에 적용한 방식과 정확히 같은 원리였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이런 효과가 얼마나 놀랍고 새로웠는지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매일 영상을 통해 움직이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세상이니까요. 하지만 17세기 사람들에게 이런 생동감 있는 인물이 캔버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건 거의 마법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의 작품을 두고 말했습니다. "마치 그림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듯하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고흐도 동생(테오)에게 쓴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프란스 할스의 그림을 보는 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몰라! 모든 게 똑같은 방식으로 매끄럽게 마무리된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 완전히 다르다니까!”


그가 보통 사람을 그렸다는 사실도 특별합니다. 할스 작품에 푹 빠진 고흐는 1888년 친구 화가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할스는 예수도, 천사도, 부활도, 관능적인 나신도 그린 적이 없다. 그가 그린 건 초상화뿐이었다. 군인, 양조업자, 부부, 아름다운 집시 여자, 술꾼, 갓난아기…."

당대 미술계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은 장르는 종교·신화·역사를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평범한 사람을 그린 그림은 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할스는 낮은 평가를 신경 쓰지 않고 일반인들의 그림만 그렸습니다. 자기 동네의 평범한 사람들을 거친 붓질로 잡아내는 것. 모네와 마네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200년 뒤에 한 일이 정확히 이것이었습니다. 주제 면에서도 그가 자기 시대를 한참 앞서간 것입니다. 열네 명의 아이, 평생 무주택할스는 잘나가는 화가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림도 잘 그리고 인성도 훌륭한 사람이 어쩌다 가난해졌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가족이었습니다.


할스는 두 번 결혼했습니다. 1610년 첫 아내와의 사이에서 자녀 셋을 뒀고,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재혼했습니다. 그리고 재혼한 아내와 아이를 열한 명이나 더 낳았습니다. 총 열네 명. 아이를 많이 낳던 시절임을 감안해도 당시 네덜란드 평균(4~5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숫자입니다. 그 중 다섯 명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나고, 아홉 명이 살아남았습니다.

매 끼니 부부를 포함해 총 11인분의 식사가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자식들 교육비, 옷값, 결혼시키는 비용까지 들었습니다. 자식이 많다 보니 사고가 나는 일도 잦았습니다. 아무리 의뢰를 많이 받아도 돈이 남을 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할스의 전성기였던 1630년대에도 동네 정육점, 빵집, 신발가게 등이 "빚을 못 받았다"며 법원에 그를 제소한 기록이 여럿 남아 있습니다.

가족을 두고 차마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자존심 때문이었을까요. 할스는 출장 의뢰를 지독히 싫어했습니다. 1633년 벌어진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그해 암스테르담 시민군은 할스에게 단체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16명을 담은 그림을 그려주는 대가로 시민군이 제시한 금액은 1인당 60길더. 총 960길더는 지금 한국 돈으로 약 1억원에 달하는 큰 액수였습니다. 9년 뒤 렘브란트가 '야경'으로 한 명당 100길더를 받았다는 점과 비교해도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요. 그런데 할스는 모델들이 자기 작업실로 와야 한다며 17km 거리의 통근을 거부했습니다. 시민군 입장에서는 어이없는 요구였습니다. 결국 의뢰는 날아갔습니다.


아무리 일해도 돈이 쌓이지 않는 환경에 더해, 부동산 문제가 결정타를 날렸습니다. 17세기 네덜란드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부(富)의 핵심은 부동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 네덜란드의 부동산 가격이 급격히 올랐습니다. 이로 인해 부동산을 갖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희비가 극명하게 갈렸습니다.

예를 들어 할스의 동료 화가 피터르 더 그레버르는 비슷한 시기 같은 도시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레버르는 집을 여러 채 사들인 덕분에 자산가가 됐습니다. 반면 화가로서 더 잘나가던 할스는 평생 단 한채의 집도 사지 못했습니다. 돈이 들어오는 대로 열네 명의 가족이 다 받아 갔고, 그러고 나면 남는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스는 평생 셋방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연구자들에 따르면 이 시기 할스가 살았던 하를럼의 임대료는 평균적으로 가구 소득의 30~50%에 달했다고 합니다. 지출도 많은데 월세도 계속 나가니 자산이 쌓일 수가 없는 구조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할스는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평생 빚쟁이로 살았습니다. 의뢰가 들어오면 그 돈으로 한 군데 빚을 갚고, 다른 데 또 빚을 졌습니다. 젊을 때는 버틸 만 했습니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며 할스의 그림 그리는 속도는 느려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1650년대부터 네덜란드 경제가 안 좋아졌습니다.

평생 그가 키운 자식들도 별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자식들 모두 자기 한 몸 건사하기에도 빠듯했습니다. 1654년, 결국 할스는 동네 빵집에 진 빚을 못 갚아 살림이 압류되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압류된 살림을 기록한 목록이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매트리스 세 개, 베개 몇 개, 옷장 하나, 탁자 하나, 그림 다섯 점. 70대 거장에게 남은 건 그게 전부였습니다. 평범한 시선80세가 된 할스는 더는 자기 힘으로 생활하기 어려운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하를럼 시 당국은 그에게 종신연금을 주기로 했습니다. 화가에게 도시가 종신연금을 주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었습니다. 거장으로서 할스의 업적을 존경한다는 의미였지요.


2년 후 겨울은 유난히 추웠습니다. 82세의 할스는 시 당국에 토탄(난방용 연료)을 추가로 요청했습니다. 하를럼 양로원이 그에게 토탄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양로원은 할스에게 단체 초상화 두 점을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양로원에 돈을 대주는 부자들의 초상화를요. '하를럼 양로원의 여성 이사들'이 그 중 하나입니다.

그냥 보면 모르는 서양 노인들이 앉아 있는 광경이지만, 이런 사정을 알고 보면 그림은 흥미롭습니다. 한 명은 모델을 서기가 귀찮은지 거의 짜증 난 것처럼 보입니다. 같은 시기 렘브란트가 그린 '직물조합 임원들'(1662)에서 임원들이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할스도 충분히 이사들을 권위 있는 모습으로 그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게 할스가 평생 한 일이었습니다. 자선을 베푸는 부자든 자선을 받는 빈민이든 그의 앞에 앉으면 그냥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상대방을 깎아내리지도 않았고 아부하지도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렸을 뿐입니다.

실력은 비범했으나 할스의 생활은 평범했습니다. 오히려 운이 나쁜 편이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평범한 생활을 하던 화가가 평범한 삶을 그린 덕분에, 수백 년 전 먼 땅에 살았던 낯선 사람들은 왠지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오래전에도 아기는 사람들을 기쁘게 했습니다. 멋지게 차려입은 부자도 있었고, 가난과 질병에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술에 취하기도 하고, 즐겁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수백 년 후에도 사람들의 생활은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그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알 수 없는 안도감으로 따뜻하게 감쌉니다.

<i>*이번 기사는 Frans Hals (Seymour Slive 지음), The Signature Style of Frans Hals (Christopher D.M. Atkins 지음), Frans Hals (Rijksmuseum·National Gallery London·Gemaldegalerie Berlin 공동 도록)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 명화 시리즈의 완결편 <명화의 완성, 그때 그 사람> 이 출간됐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문화재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국내 문화 분야 구독자 1위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기자 페이지 구독+ 버튼을 누르시면 미술 소식과 전시에 대한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8만명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출간된 4권의 책으로 곁에 두실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