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방송영상 콘텐츠 산업의 제작 수요가 전반적으로 침체한 가운데,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공룡인 넷플릭스의 영향력은 독점적 수준으로 확대된 것으로 나타났다.
플랫폼의 주도권이 모바일과 OTT로 완전히 전환되면서, 실시간 TV 시청률을 기반으로 유지되던 지상파 및 유료방송사의 핵심 수익 모델인 광고와 VOD 매출이 사상 초유의 붕괴 현상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국내 방송사와 토종 OTT의 제작 재원이 고갈돼 대작 드라마 공급이 무너지는 반면, 넷플릭스가 유일한 거대 공급처로 자리 잡으며 미디어 생태계 전체가 해외 자본에 비대칭적으로 종속되는 불균형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 안방극장 시청자 이탈…레거시 미디어 수익 모델의 파산
대한민국 미디어 시장의 패러다임이 복구 불가능한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지상파 방송과 케이블TV, 인터넷멀티미디어방송(IPTV) 등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로 불리는 유료방송 서비스는 사상 유례없는 성장 정체 국면에 직면했다.
방송미디어통신위원회와 정보통신정책연구원이 발표한 '2025년도 방송시장 경쟁상황 평가'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2024년 말 기준 국내 유료방송서비스의 총가입자 수는 3630만 명가량으로 전년 대비 겨우 0.04% 증가하는 데 그쳤다. 2021년 2.9%, 2022년 1.5% 수준이던 가입자 증가율이 2023년 0.01%로 무너진 이후 사실상 '제로 성장'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료방송사업자의 총매출 역시 7조2361억원으로 전년 대비 단 0.1% 증가하는 데 머물렀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수치상 가입자 방어에도 불구하고 실제 TV 앞에 앉아 있는 시청 시간이 급감했다는 사실이다. 2024년 기준 국내 개인의 하루 평균 TV 시청 시간은 139분에 불과해, 불과 3년 전과 비교해 21.9%나 폭락했다.
지상파 채널과 유료방송 채널의 시청 시간이 동시에 내려앉은 배경에는 제한된 인간의 시간 자원을 넷플릭스 등 글로벌 OTT 플랫폼이 완전히 장악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시청자들이 실시간 TV 방송을 해지하고 OTT로 이동하는 '코드커팅(cord-cutting)' 현상이 전방위적으로 가속화하고 있는 모양새다.
플랫폼 권력이 디지털로 이행함에 따라, 실시간 방송 시청률을 지탱하던 방송사의 자금줄이 마르고 있다. 가장 가파른 궤적으로 붕괴하는 영역은 바로 방송광고시장이다. 2024년 국내 방송광고시장 총매출액은 전년 대비 6.8% 감소한 2조1976억원으로 집계됐다. 전체 광고 시장에서 라디오를 제외한 TV 방송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17.7%까지 추락했다.
한때 전체 광고 시장의 절반 이상을 호령하던 지상파와 유료방송 채널의 지위가 온라인 및 모바일 광고의 거센 성장에 밀려 변방으로 밀려난 모양새다. 여기에 넷플릭스와 티빙 등 거대 OTT 사업자가 경쟁적으로 '광고형 요금제(AVOD)'를 도입하고 가입자를 빠른 속도로 확보하면서, 방송사의 숨통을 쥐고 있던 방송광고 물량마저 급격히 흡수하는 대체 압박을 가하고 있다.
과거 방송사의 짭짤한 사후 수익원이던 VOD(주문형 비디오) 매출 역시 참혹한 성적표를 남겼다. 유료방송사업자의 2024년 VOD 매출은 4434억원에 그쳐, 전년 대비 8.5%나 감소했다. 이는 2018년 이후 단 한 차례의 반등도 없이 지속해서 내리막길을 걷는 수치다.
시청자들이 편당 1000원 혹은 2000원씩 내고 유료방송 VOD를 구매하기보다 월정액을 내면 수만 편의 콘텐츠를 무제한으로 감상할 수 있는 OTT 서비스로 완전히 결제 패턴을 바꿨기 때문이다. 핵심 비즈니스 모델의 파산은 곧 국내 방송사 및 제작사의 자금 경색으로 이어졌고, 이는 한국 콘텐츠 생태계의 허리를 끊어놓는 단초가 됐다.
◆ 글로벌 자본의 천문학적 낙수효과…이면의 양극화
이처럼 국내 플랫폼 기반이 흔들리는 와중에,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 콘텐츠가 거둔 성과는 역설적이게도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다.
최근 글로벌 시장을 다각도로 분석해 공표된 '넷플릭스 이펙트' 보고서에 따르면, 넷플릭스는 2016년부터 영화 및 시리즈 제작 분야에만 1350억달러(약 202조원) 이상의 자금을 쏟아부었으며, 투자액의 2.4배를 웃돌며 전 세계적으로 약 3250억달러(약 448조원) 규모에 이르는 천문학적 부가가치를 파생시킨 것으로 추산된다. 아울러 글로벌 50여 개 국가에서 일자리 42만5000개 이상을 창출하며 고용 지표 안정과 지역 자생력 확보에도 상당 부분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대한민국은 이 같은 글로벌 자본의 전폭적인 투자를 발판 삼아 세계적인 문화 발신지로 도약한 가장 대표적인 수혜국이다. 실제로 넷플릭스 플랫폼 내 비영어권 콘텐츠 중에서 한국어 작품이 차지하는 점유율은 20% 선까지 치솟으며 독보적인 왕좌를 고수하고 있다. 전 세계 시청 시간 기준으로도 우리 콘텐츠의 소비 비중은 8.8%에 달해 미국에 이은 글로벌 2위 자리를 견고히 다졌다.
이에 따른 내수 유발 효과와 사회적 파급력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아이유·박보검 주연의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과 역사를 담아낸 '폭싹 속았수다'는 제작 과정에만 600여 명의 크루와 4000여 개 협력업체가 동원되며 국내 경제에 900억원이 넘는 막대한 자산 가치를 불어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오징어 게임'은 관련 패션 소비량을 8000% 가까이 폭증시키며 2년 연속 핼러윈 인기 의상 1위를 독식했고, 예능 '흑백요리사'는 출연 셰프들이 운영하는 식당의 예약률을 평균 148%나 끌어올리는 등 극심한 경기 침체로 신음하던 요식업계와 골목 상권의 특수 유발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여기에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역시 글로벌 한국 문화 열풍의 핵심 기폭제로 작용했다. 해당 작품의 전 세계적 흥행 이후 현지 언론과 교육 앱 '듀오링고' 등에 따르면 미국 내 한국어 학습자 수가 22% 급증하고 한국행 항공권 예약률이 25% 상승하는 등 실질적인 인바운드 지표를 견인했다.
한국관광공사가 집계한 올해 1분기 외래 방문객 규모가 전년 동기 대비 23% 증가한 476만 명을 기록하며 역대 최대치를 갈아치운 배경 역시 이 같은 '넷플릭스 발 나비효과'가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진단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넷플릭스 유저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도 한국 콘텐츠를 접한 시청자의 72%가 "향후 한국을 직접 방문하고 싶다"고 응답해 문화 콘텐츠가 지닌 강력한 외교·관광 유발 효과를 방증했다.
화려한 지표와 달리, 생태계 내부의 그늘은 깊고 어둡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간한 '2025 한류백서'에서는 국내 미디어 업계가 직면한 차가운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이 백서에 따르면 대한민국 전체 문화 콘텐츠의 수출 총액 자체는 우상향 곡선을 그렸으나, 실질적인 과실은 글로벌 공룡 플랫폼과 직접 소통이 가능한 극소수 대형 제작사에만 집중되는 극단적인 쏠림 현상이 나타났다.
글로벌 자본의 직접적인 간택을 받지 못한 토종 미디어의 입지는 급격히 축소됐다. 실제로 국내 대표 지상파 방송사의 콘텐츠 수출 규모는 전년 대비 4.4% 줄어들었으며, 중소 외주 제작사(CP)들이 해외 시장에서 거둔 수출 실적은 21.1%나 급감한 것으로 집계됐다. 자본과 인프라를 갖춘 대형사만 살아남고 허리를 지탱해야 할 중소 업체는 고사하는 전형적인 양극화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 K콘텐츠와 자생력 회복을 위한 과제는
이는 국내 제작 진영이 거대 자본의 달콤한 제안에 매몰되면서 자체 지식재산권(IP)을 통째로 넘겨주고 단순 제작 대행 기지로 전락하는 이른바 '화려한 감옥' 현상을 여과 없이 방증한다. '킹덤'의 김은희 작가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매기 강 감독처럼 글로벌 무대로 도약하는 스타 크리에이터가 배출되는 화려함 이면에는, 토종 인프라의 파산이라는 뼈아픈 대가가 따른다.
이 같은 불균형의 여파로 시장을 개척하던 1세대 토종 OTT 기업들은 극심한 경영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법정 관리 절차를 밟기 시작했으며, 주요 유력 방송사들마저 구조조정과 희망퇴직 카드를 꺼내 드는 등 내부 생태계는 심각한 공동화 현상과 마주하고 있다.
재원이 고갈된 국내 지상파와 종합편성채널 등 국내 방송사업자들은 대대적인 제작비 감축에 들어갔다. 시장에 돈이 돌지 않으니 드라마 편성이 줄고, 중소 외주 제작사의 경영난이 심화됐다. 실제 국내 지상파 3사와 유료방송사업자의 직접 제작비는 2024년 2조9709억원으로 전년 대비 2.3% 소폭 증가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내부 인건비와 제작비 상승분을 겨우 반영한 수준에 불과하다.
반면 외주 단편 및 드라마 외주 제작 시장의 활력을 나타내는 '외주 제작비' 규모는 9878억원에 그치며 전년 대비 2.2% 완연히 줄어들었다. 국내 방송사와 토종 OTT가 공동으로 발주하는 드라마 공급 개수 역시 2023년 112개에서 2024년 108개로 감소 전환했다.
테드 서랜도스 넷플릭스 공동 최고경영자(CEO)는 "진정한 글로벌 엔터테인먼트가 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로컬 스토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본질을 잘 알고 있다"며 "세계 곳곳으로 제작 기지를 넓히고 인재 양성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산업 전반의 롱런을 위해 창작 생태계와 팬들과의 관계에 지속적으로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글로벌 공룡의 지배력 강화로 인한 토종 생태계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이제 정부와 학계, 미디어 산업계가 머리를 맞대고 강력한 조치를 취해야 할 시점이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규제 형평성 확보와 합리적인 통계 인프라 구축이다. 현재 국내 방송사업자들은 방송법에 따라 매출액, 회계 보고, 재산 상황 등을 낱낱이 공표하고 엄격한 경쟁상황 평가 조사를 받고 있다.
반면 생태계의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하는 글로벌 OTT 사업자는 부가통신사업자로 분류돼 가입자 수, 정확한 매출액, 마진율 등 핵심 시장 데이터를 정부에 제출할 법적 의무가 없다. 깜깜이 시장 정보 속에서 국내 사업자만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비판이 터져 나오는 이유다.
"넷플릭스 없이는 대작을 만들 수 없다"는 한탄은 역설적으로 한국 K콘텐츠의 화려한 겉모습 뒤에 숨겨진 깊은 구조적 모순을 방증한다. 토종 플랫폼의 기초 체력을 키울 수 있는 규제 완화와 세제 혜택, 그리고 원천 IP를 보유한 제작사에 대한 금융 지원이 입체적으로 맞물리지 않는다면, 대한민국 안방극장은 머지않아 글로벌 OTT의 영구적인 하청 기지로 고착화될지 모른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