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좇기를 거부한 '진짜'…BTS가 美 주류 음악계에 던진 화두 [더 라이프이스트-홍재화의 매트릭스로 보는 세상]

입력 2026-06-17 14:14

미국 대중음악 시장은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고 보수적인 자본 논리로 움직이는 난공불락의 요새다. 이곳에서 아시아의 한 보이그룹이 주류 엔터테인먼트의 정점에 오르고, 단순한 팝스타를 넘어 하나의 거대한 사회문화적 현상으로 대접받는 배경에는 미국 시장의 기존 질서를 파괴한 혁신적 키워드가 존재한다.

지난달 19일, 미 서부 정보기술(IT)과 인재의 심장부인 캘리포니아 스탠퍼드 스타디움에서 막을 내린 방탄소년단(BTS)의 3회 연속 매진 공연은 이들의 위상을 다시 한 번 증명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콜드플레이 같은 전설적 밴드조차 쉽게 허락받지 못했던 보수적인 대학 교정의 스타디움을 사흘간안 15만 명의 인파로 가득 채운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미국의 저명한 음악 평론가 제프 벤자민(Jeff Benjamin)을 비롯한 현지 전문가들은 그 핵심 성공 요인으로 단 하나의 단어를 꼽는다. 바로 ‘진정성(Authenticity)’이다. 그들은 미국의 주류 트렌드를 조잡하게 좇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들의 목소리와 철학을 고수하는 정공법으로 미국 시장을 복종시켰다. 가짜(Fake) 시장을 뒤흔든 ‘날것 그대로의 진정성’오늘날 미국 주류 팝 시장은 철저히 기획된 세련됨과 막대한 자본의 마케팅으로 움직인다. 저스틴 비버나 아리아나 그란데 같은 최정상급 팝스타들은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하는 매력적 콘텐츠를 생산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형 기획사에 의해 철저히 상품화된 이미지를 보여주거나 자극적인 사생활 이슈, 가십거리로 소모되며 대중에게 피로감을 주기도 한다. 전 세계 소비자들이 완벽하지만 역설적으로 차갑고 기계적인 '공장형 스타'들에 실증을 느끼고 있을 때 BTS가 던진 충격은 '날것 그대로의 진정성'이었다.

BTS는 미국 시장의 주류 테마인 단편적인 사랑, 파티, 혹은 물질적 과시를 노래하지 않았다. 대신 중소 기획사 출신이라는 ‘흙수저’로서의 좌절, 기성세대의 시스템에 대한 저항, 청춘의 잔인한 방황, 그리고 현대인들이 마주한 정신건강(Mental Health) 문제를 음악의 중심에 놓았다. 데뷔 초의 사회 비판적 메시지부터 세상을 치유하고자 하는 ‘Love Yourself(너 자신을 사랑하라)’ 연작 시리즈, 이번 월드 투어 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음악은 아티스트 개인의 성장 드라마이자 거대한 철학적 서사 구조를 가졌다.

미국 팬들은 BTS의 음악에서 자국 스타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깊은 내면의 고백과 취약성의 노출을 발견했다. 완벽한 척 포장된 영웅이 아니라 상처받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인간적인 아티스트의 모습은 미국 청년 세대에게 단순한 오락을 넘어 강력한 심리적 위로와 유대감을 제공했다. 미국 평단이 이들을 "가장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안티테제(Antithese)"라고 평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류 언어의 독점을 깨부순 ‘한국어 가사’의 정체성미국 음악 비즈니스계에서 비(非)영어권 아티스트가 성공하기 위한 오랜 불문율은 ‘영어 곡의 발매’였다. 과거 많은 해외 뮤지션들이 미국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국어를 버리고 전곡을 영어로 개사하는 ‘쉬운 길’ 혹은 ‘타협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BTS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글로벌 팝 시장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가는 순간에도 한국어 가사와 자신들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고수하는 뚝심을 보여주었다.

62년 빌보드 역사상 최초로 한국어 가사 곡인 ‘Life Goes On’으로 메인 싱글 차트 ‘핫 100’ 1위를 거머쥔 사건은 미국 음악계에 거대한 패러다임 시프트를 일으켰다. 서구 중심주의적 시각에서 언어는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절대적인 장벽이었으나, BTS는 음악의 본질적인 에너지와 진심만으로 그 장벽을 무력화시켰다.

현재 미국 시장의 핵심 소비 주체인 Z세대와 알파 세대는 더 이상 ‘영어’라는 언어적 껍데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디지털 네이티브이자 문화적 다양성에 개방적인 이들은 언어의 다름을 장벽이 아닌 ‘독창적인 브랜드의 매력’으로 받아들였다. 미국 팬들은 한국어 가사를 영어로 번역하고, 그 안에 담긴 은유와 문학적 맥락을 스스로 연구하며 BTS의 세계관에 자발적으로 동참했다. 기획사발(發) 주입식 콘텐츠에 질린 미국의 젊은 소비자들에게, BTS의 한국어 노래는 탐구하고 소유하고 싶은 '가장 힙하고 독창적인 텍스트'로 기능한 것이다. 영어를 고집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대체 불가능한 고유의 영역을 구축하는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트렌드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트렌드가 되다결국 미국 주류 사회와 평단이 BTS를 세계 최고 수준의 아티스트로 인정하고 대접하는 이유는, 이들이 미국이 만든 비즈니스 문법을 추종해서가 아니라 미국이 가지지 못한 새로운 대안적 문법을 창조했기 때문이다.

미국 트렌드를 모방하는 아티스트는 언제나 시장의 ‘2인자’나 ‘대체재’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나 BTS는 자신들의 취약성을 무기로 삼은 진정성 있는 서사, 그리고 한국어라는 언어적 정체성을 철저하게 밀어붙임으로써 시장의 ‘원조(Original)’ 지위를 획득했다.

기획된 세련됨에 가려진 미국 팝 시장의 공백을 완벽하게 관통한 이들의 전략은, 이제 미국 음악 산업 자체가 K팝 시스템과 팬덤 생태계를 연구하고 모방하게 만드는 '역전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미국 트렌드를 좇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계를 밀어붙인 뚝심. 트렌드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가장 거대한 트렌드가 된 것, 이것이 미국이 BTS라는 시대적 현상에 경의를 표하는 본질적인 이유다.

<한경닷컴 The Lifeist> 홍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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