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콩쿠르가 '나를 위한 연주'였다면 앞으로의 무대는 달라질 것 같아요. 관객분들이 제 연주를 듣기 위해 와주시는 거니까요. 더 큰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준비하게 됩니다."
지난해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본선에 진출해 쇼팽의 정수를 섬세하게 펼쳐낸 피아니스트 이관욱(29). 그가 오는 21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홍석원이 지휘하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국내 첫 협연 무대에 오른다.
최근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이관욱은 하얀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의 수수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건반을 덮고도 남을 듯 큼직하고 길쭉한 두 손만이 그가 무대 위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피아니스트임을 짐작하게 할 뿐이었다. 그는 이번 첫 협연 무대에 대해 "시작부터 훌륭한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선생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운이 좋다"며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고 담담히 말했다.
이관욱이 피아노를 처음 접한 건 네 살 무렵이다. 친누나의 피아노 연주를 곧잘 따라 하는 것을 본 부모님이 그를 옆집 피아노 교사한테 보낸 게 시작이었다.
"부모님 말씀으로는 제가 어렸을 때부터 먼저 나서는 성격은 아니었다고 해요. 피아노도 제가 나서서 '시켜달라'고 한 건 아니었고요. 그런데 막상 시켜놓으면 재밌어했다고 해요. 예원학교 입학시험에 붙으면 계속 음악을 하고, 떨어지면 그만두기로 했는데 운이 좋게도 붙어서 지금까지 하고 있어요."
예원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예고·연세대를 거쳐 현재 독일 데트몰트 국립음대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밟고 있다. 이곳에선 플루트 등 다른 악기의 반주를 맡은 덕에 다양한 레퍼토리를 익힐 수 있다.
"독주 악기로서의 피아노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음악을 이끌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줘야 해요. 반면 앙상블에선 다른 악기를 받쳐줘야 하고, 때로는 지지 않고 싸우거나 오히려 다른 악기를 넘어서야 하는 다양한 순간이 생겨요. 피아노 독주만으로는 경험할 수 없는 부분이죠."
작년 10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쇼팽 콩쿠르는 초심을 되새기는 값진 경험이 됐다. 비록 본선 3라운드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그는 영국 클래식 음악 전문지 그라모폰(Gramophone)으로부터 "자연스럽고 유려한 흐름과 시적인 깊이를 보여줬다"는 호평을 받았다.
"쇼팽 곡으로만 2시간 넘는 레퍼토리를 준비하면서 어릴 때 익혔던 곡부터 최근 연주한 곡까지 다시 꺼내 보게 됐어요. 1라운드 때 연주한 왈츠(Op.42)도 초등학생 3~4학년 때 처음 쳤던 곡이에요. 오랜만에 그 곡을 다시 연주하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어렸을 때 피아노를 순수하게 좋아하던 그 초심을 다시 찾게 된 것 같아요."
물론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모인 쇼팽 콩쿠르의 압박감도 상당했다. 이번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에릭 루를 비롯해 이미 스타급 연주자로 활동 중인 쟁쟁한 참가자들과 경쟁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누군가와 피부로 와닿는 경쟁을 해본 적이 많지 않았어요. 막연히 '세상에는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이 정말 많다'고만 생각했는데, 콩쿠르 무대에 서니 남들과 비교하게 되면서 마음도 힘들어지더라고요."
하지만 그는 부정적인 생각은 오래 붙들고 있지 않았다. "남과 비교하는 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물론 무엇이 부족한지 돌아보는 과정은 필요하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잘하는 점을 부러워하기보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하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이관욱이 21일 협연 무대에서 선보일 곡은 러시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이다. "곡 자체가 너무 유명해 부담되는 점은 많지만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연주를 하려고 해요. 곡 자체의 서사가 완벽하고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힘을 주면 오히려 과해질 것 같아요."
그는 무대에 오르기에 앞서 향수를 뿌리는 습관이 있다. 은은한 흙내음과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섞인 이솝(Aesop)의 테싯(Tacit) 향을 즐겨 뿌린다고. "익숙한 냄새가 무대에서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거든요. 그래서 향수를 챙기려고 하는 편이에요."
올해부터는 국내 무대에서 그를 더 자주 만날 수 있을 전망이다. 협연 이후 오는 9월에는 서울 예술의전당과 대구 수성아트피아대극장에서 각각 독주회가 예정돼 있다. 그가 "언젠가 다뤄보고 싶었던" 리스트의 '순례의 해 제2년 이탈리아'를 1부, 쇼팽의 발라드 전곡(4곡)을 2부로 구성했다.
이른 시일 내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마음도 내비쳤다. "브람스가 젊은 시절에 작곡한 곡이라 되도록 빨리 연주해보고 싶어요. 최근 들어 제가 좋아하기 시작한 작곡가이기도 하고요. 제 성격과 비슷했을 것 같아서 마음이 가요. 겉으로 내세우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안에선 끓고 있는 게 느껴지는 작곡가예요."
이 말을 듣고 보니 그가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브람스가 진하게 묻어나고 있었다. 강한 자아로 음악의 본질을 흐리기보다, 자신을 낮추며 음악 그 자체를 빛내는 연주자. 앞으로 꺼내 보일 게 더 많은 피아니스트임이 분명해 보였다.
"앞으로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하는 연주자가 되고 싶어요. 음악보다도 저 자신을 앞세우면 부담스럽게 느껴질 때가 있거든요. 제 음악적 해석이 관객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갈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러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려고 합니다."
허세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