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호명되는 ‘환경’
좌대에 놓이지도 벽에 걸리지도 않는 형식, 전시가 끝나면 해체되어 사라진 작업. 1956년부터 1976년까지 환경 미술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여성 작가 11인의 작품이 리움미술관에 복원됐다. 정강자의 ‘무체전’이 56년 만에 다시 호흡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검은 장막을 걷고 안으로 들어선다. 한순간 시야가 깜깜해진다. 갑작스러운 사이렌, 회전하는 핀 조명,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광선, 발치에 내려앉는 연기. 그리고 어둠 속을 가르는 목소리.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1970년 8월, 서울 소공동 국립공보관에서 들렸을 그 목소리가 56년의 세월을 건너 다시 들려온다. 한국 1세대 행위예술가 정강자(1942~2017)의 첫 개인전이자, 회화도 조각도 없이 공간 그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한 ‘무체전(無?展)’. 정부 당국이 사흘 만에 강제 철거했던 이 환경 작업이 처음으로 관객 앞에 다시 섰다. 리움미술관에서 5월 5일 개막해 11월 29일까지 이어지는 기획전 <다른 공간 안으로: 여성 작가들의 공감각적 환경 1956~1976>의 한가운데에서다.
사라진 형식, 사라진 작가들
전시는 우선 미술사에서 사라진 한 형식을 복원하는 데서 출발한다. ‘환경(ambiente)’이라는 용어는 1949년 루치오 폰타나가 자신의 실험적 작업을 설명하며 처음 썼다. 벽에 걸리거나 좌대에 놓인 작품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관람자가 작품 안으로 들어가 빛·소리·색·공기·움직임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형식이다. 1956년 일본 구타이 그룹의 야외전에서 야마자키 츠루코가 선보인 거대한 붉은 모기장 ‘빨강’부터 1976년 제37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제르마노 첼란트가 기획한 <환경/ 예술 미래주의부터 바디 아트까지(Ambiente/ Arte Dal Futurismo alla Body Art)> 전까지, 환경 미술은 20년간 전 세계 미술의 최전선에 있었다. 그러나 1976년을 분기점으로 이 용어는 ‘설치 미술’에 자리를 내주었고, 환경의 역사는 점차 미술사 바깥으로 밀려났다.
이 사라짐의 자리에서 가장 먼저 지워진 것은 여성 작가들이었다. 좌대에 놓이지 않고 벽에 걸리지도 않으며 사고팔 수도 없는 형식. 회화와 조각 중심의 제도 미술에서 비켜서 있던 여성 작가들에게 환경은 오히려 해방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로 이들의 작업은 가장 먼저 잊혔다. 전시가 끝나면 해체되어 폐기되었고, 사진과 도면조차 거의 남지 않았다. 공동 기획자인 안드레아 리소니(하우스 데어 쿤스트 예술감독)와 마리나 푸글리에세(밀라노 MUDEC 관장)는 이를 두고 “환경 예술의 역사는 곧 파괴와 소실의 역사이며, 여성 작가들은 미술사와 환경 예술의 역사 양쪽 모두에서 잊히거나 지워지는 이중의 소외를 겪었다”고 말한다.
“일종의 포렌식 작업”
2023년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트에서 처음 공개된 이 전시는 로마 막시(MAXXI)와 홍콩 엠플러스(M+)를 거쳐 리움에 도착했다. 테이트 모던 큐레이터로 일하다 하우스 데어 쿤스트로 자리를 옮긴 리소니는 처음에는 남성 작가와 콜렉티브를 아우르는 환경 미술 리서치를 진행했다고 한다. “자료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을 때 서로 다른 작업을 잇는 붉은 실이 보였습니다. 여성 작가들이 착안한 환경 작업이었죠.” 지난 4월 29일 기자간담회에서 그는 말했다. “이 확장된 조각들은 젠더와 지역을 넘어 기존 미술사를 다르게 서술하도록 합니다.”
푸글리에세는 이번 작업을 “일종의 포렌식 작업”에 비유했다.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존연구가와 미술사가들이 작가 및 유족과 협력해 전 세계로 흩어진 서신과 건축 도면, 비평 기사, 사진 자료를 추적하며 사라진 작업을 단서 삼아 복원했다. 작가가 생존해 있는 경우에는 당시 못다 이룬 구상을 애초 의도에 가까운 형태로 다시 실현했다. 주디 시카고, 마르타 미누힌, 타니아 무로는 직접 자신들의 환경을 현재의 조건에서 다시 손봤다.
전시장에는 11인의 여성 작가가 1956년부터 1976년 사이에 만든 환경 작업이 실물 크기로 펼쳐진다. 1956년 일본 아시야 공원에서 처음 발표됐을 때 거대한 등불처럼 빛났을 야마자키 츠루코의 ‘빨강’(1956), 직각과 콘크리트의 근대 건축 질서를 거부하며 부드럽고 신축성 있는 나일론 천으로 무지갯빛 통로를 만든 알렉산드라 카수바의 ‘스펙트럼 통로’(1975), 1960년대 미국 미니멀리즘의 차가운 강철 물성에 저항하듯 깃털로 가득 채워 공간 자체를 부드럽게 변형시킨 주디 시카고의 ‘깃털의 방’(1966/2023)이 이어진다. 시카고는 하우스 데어 쿤스트 전시 개막 영상에서 "남성 중심의 대지 미술과 환경 미술이 떠받들어지던 세계를 부드럽고 여성적으로 바꾸고 싶었다"고 말했다. 리지아 클라크의 ‘집은 신체’, 레아 루블린의 ‘팔루스 모빌리스’ 같은 작업은 더 나아가 신체와 정치, 젠더에 대한 도발적 발언을 환경의 언어로 옮긴다.
리움 버전이라는 결정판
두 기획자는 여러 순회 버전 중 리움 전시를 "지금까지 가장 완성도 높은 버전"이라 말한다. 단순한 외교적 발언이 아니다. 뮌헨 버전에 포함됐던 마리아 노드만, 페이스 와일딩의 자리에, 리움에선 정강자의 ‘무체전’과 마리안 자질라·라 몬테 영·최정희의 ‘드림 하우스’(1966~현재)가 들어갔다. 환경 미술의 지도를 아시아 쪽으로 다시 그리는 결정적인 보완이다.
정강자는 1960~70년대 한국 아방가르드 그룹 '신전동인'과 '제4집단'에 거의 유일한 여성 작가로 참여하며 신체와 행위를 매체 삼아 기성 관념에 도전했다. 그러나 한국 미술사는 오래도록 그를 '해프닝과 누드 퍼포먼스의 작가' 정도로만 기록했다. 환경 작업으로서의 ‘무체전’을 재조명하기 위해 리움은 1970년 당시의 신문 기사와 작가 노트, 유족의 증언과 음성 자료를 단서 삼아 공간을 재구성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작가의 목소리는 유족이 제공한 음성 자료를 토대로 AI 음성으로 복원했다. 1970년 그 자리에서 확성기를 들고 "여러분은 지금 나의 작품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라고 말했을, 그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진다. 박정희 정권 시기 정부 당국(공보관)은 사흘 만에 이 전시를 강제 철거했고, 작가는 그 뒤 한강 백사장에서 한국의 문화정책을 통곡한다는 내용의 플래카드를 불태우며 항의했다고 전해진다. 56년이 지난 지금, 그 통곡의 자리가 처음으로 미술사 안으로 호명된다.
또 하나의 결정적 보완이 아시아 첫 공개인 ‘드림 하우스’다. 시각예술가 마리안 자질라(1940~2024)와 실험음악의 거장 라 몬테 영이 1962년에 구상해 1966년 뉴욕 처치 스트리트의 로프트에서 처음 실현한 이 작업은, 1993년부터 같은 건물 한 층 위에 멜라 파운데이션(MELA Foundation) 운영의 영구 설치 형태로 자리 잡았다. 다양한 빛으로 물들여진 공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사인파(sine wave) 음향이 재생되어 관객의 시공간 지각을 확장한다.
1999년부터 자질라와 영의 제자로 합류한 한국계 작가 최정희가 함께 이 환경을 이어가면서, 세대를 가로지르는 협업이 완성되었다. 정강자의 ‘무체전’이 56년 만에 복구되는 '복원의 시간'이라면, ‘드림 하우스’는 1960년대에 시작되어 지금도 이어지는 '지속의 시간'이다. 김성원 리움 부관장의 표현대로, 이 두 시간이 함께 놓일 때 환경은 "봉인된 역사적 장르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다시 쓰이는 살아 있는 형식"으로 거듭난다.
세 전시의 조응
흥미로운 것은 리움이 지금 같은 시기에 열고 있는 다른 전시들과 이 전시가 만들어내는 조응이다. 램 쿨하스가 설계한 블랙박스 안에서는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설치 미술'의 초기 버전이라 할 환경 미술의 20년을 경험한다. 장 누벨이 설계한 M2, 불규칙한 선의 전시 박스에서는 <티노 세갈>전이 열린다. ‘이 입장’이 ‘이 환희’로 막 교체되어, 로비까지 환희의 멜로디가 울려 퍼지는 중이다. 지금 이 순간에만 존재하며 다시는 반복되지 않는 세갈의 '구성된 상황'은 환경 미술의 핵심 명제?작품은 사물이 아니라 경험이라는?를 또 다른 방식으로 변주한다.
지하 강당 옆 긴 복도에서 열리는 <아카이브 이후: 이구열의 기록들>(6월 14일까지)은 한국 최초의 미술전문기자 이구열의 기록물을 펼쳐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결국 '기록'이었다"는 그의 말은, 그 시대를 동시대인으로 살며 꾹꾹 새겨둔 자료가 어떻게 후대에 연구와 해석을 위한 토대가 되는지를 증언한다. 옆 전시장에서 <다른 공간 안으로>의 큐레이터들이 4년에 걸쳐 한 일?흩어진 기록을 단서 삼아 사라진 작업을 다시 공간으로 되살리는 일?도 누군가가 그 시대를 기록해두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아카이브가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미래의 연구를 가능하게 하는 토양이라는 사실을, 두 전시는 다른 방향에서 보여준다.
동시대에 기록으로 남겨진 것을 통해 미술사를 다시 읽고(<이구열의 기록들>), 그 기록을 단서 삼아 사라진 작업을 복원하고(<다른 공간 안으로>), 지금 이 순간 단 한 번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을 작품으로 삼는(<티노 세갈>), 세 전시가 한 건물 안에서 동시에 펼쳐진다.
안동선 프리랜서 미술 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