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세기 석유가 뒤흔든 국제 질서③ [홍영식의 이슈 워치]

입력 2026-05-15 04:42


1980년대부터 석유 시장은 유례 없는 가격 급등락을 거듭하며 격동의 30년을 보냈다. 급등으로 시작했다. 이란 이슬람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한 2차 오일쇼크 후유증이 여전했다. 폴 볼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연방 기금금리를 단계적으로 20%로까지 올리는 초강력 조치를 취했다.

결과적으로 물가는 잡혔지만 그 과정에서 대가는 컸다. 일시적 경기 회복 후 다시 침체에 빠지는 ‘더블딥(Double Dip)’으로 고통은 극심했다. 고금리로 인해 기업 투자가 줄고 공장 가동률이 낮아지면서 경제는 깊은 불황에 빠졌다. 달러 강세로 미국 수출 경쟁력이 떨어졌고 중남미는 부채위기에 몰렸다. 그로 인해 석유 수요가 급감하고 유가는 급락세로 돌아섰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이외 국가들의 석유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하락세를 부채질했다.

세계 석유 수요는 1979년 하루 약 6500만 배럴에서 1984년 5980만 배럴로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석유 수요는 이 기간 15%나 급감했다(로버트 맥널리의 ‘석유의 종말은 없다’). 1977년 하루 최고 890만 배럴이던 미국의 석유 수입은 5년 뒤 500만 배럴로 줄었다. 1982년 OPEC은 감산에 합의하면서 국가별 쿼터제와 하루 산유량 목표를 채택했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만 ‘스윙 프로듀서’(생산량 조절을 통해 전체 수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국가)역할을 수행했을 뿐 다른 국가들은 합의를 지키지 않았다. 사우디는 “더 이상 무거운 부담과 의무를 감당할 수 없다”며 스윙 프로듀서 역할 포기를 선언하고 산유량을 끌어올렸다.

네 마리용 수요 증가로 급등→외환위기로 급락

미국이 나섰다. 지나친 유가 하락으로 자국의 석유업체에 치명타를 입히고 있어서다. 당시 조지 HW 부시 부통령은 사우디를 방문해 감산을 촉구했다. 사우디가 이를 받아들이고 다른 국가들의 공급량이 줄어들면서 유가는 안정세로 돌아섰다. 미국 경기는 쌍둥이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플라자 합의’로 일정 정도 회복세를 보인 반면 산유국 소련은 저유가 직격탄을 맞았다. 이는 고르바초프의 개혁 정책을 추동하는 원인이 됐고 소련 해체 결과를 낳았다.

1990년대도 석유 시장 변동은 컸다. 이라크가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한 배경엔 석유 생산량 문제가 자리하고 있다. 쿠웨이트의 석유 과잉 생산으로 유가가 곤두박질 치면서 이라크 수입이 월 5억달러 이상 날아갔다. 당시 이라크는 사우디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UAE) 등에 1000억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석유의 종말은 없다’). 쿠웨이트가 이라크 유전을 노린다는 소문도 퍼졌다. 양국 간 협의에서 쿠웨이트는 감산을 약속해놓고 어겼다.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국제시장에서 쿠웨이트 원유는 없어졌고 이라크 원유는 거래가 묶였다.

이로 인해 석유값은 순식간에 두 배로 급등했다. 미국은 전략비축유를 방출했고 사우디는 증산에 나섰다. 걸프전 전황이 미국을 주축으로 한 다국적군의 완승으로 끝날 기미가 보이자 유가는 하락세로 돌아섰다. 산유량이 증가하면서 공급과잉이 구조화되는 시기였다. OPEC 회원국들의 생산이 늘어났고 쿠웨이트 산유량도 빠르게 회복됐다. 소련이 해체되자 미국은 카자흐스탄과 아제르바이잔 등 카스피해 주변 독립국들을 우방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튀르키예로 이어지는 파이프라인 건설 지원에 나섰다. 투자 유치로 이들 국가의 석유 생산량은 늘었다(헬렌 톰슨 ‘질서 없음’). 그럼에도 아시아 네 마리 용(한국·홍콩·싱가포르·대만)의 폭발적인 경제성장에 따른 수요 증가 등으로 유가는 1996년 다시 치솟았다.

곧바로 반전됐다. 아시아의 외환위기에 대한 OPEC의 오판은 유가 폭락의 결정적 요인이었다. 태국 바트화가 붕괴되는 등 동남아시아에서 위기가 시작됐음에도 OPEC은 수요가 굳건할 것으로 보고 오히려 10% 증산을 단행했다. 수요는 둔화하는데 공급이 늘어나면서 유가는 배럴당 8달러까지 추락했다. 당시 OPEC이 이런 결정을 한 회의 장소를 가리켜 ‘자카르타의 유령’이라는 말이 회자됐다. 그 여파로 러시아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충격을 받은 산유국들은 감산에 나섰다. 위기는 숙적 이란과 사우디 관계를 잠시나마 밀접하게 했다. 이때 산유국들이 다자 감산 체제에 힘을 모으면서 ‘OPEC+’ 체제를 만드는 발판을 만들었다.

2000년대 들어서도 폭등과 폭락이 되풀이됐다. 2001년 9·11테러와 세계경제 악화, 2002년 베네수엘라 석유 노동자 파업 등이 겹쳐 유가는 급등했다. 사우디의 증산으로 꺾였으나 일시적이었다. 중국의 경제 급성장으로 인한 수요 폭증은 유가를 한층 더 밀어올렸다. 중국의 석유 소비는 1997년에서 2006년 사이 두 배 늘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석유 재벌 해체와 국유화에 따른 신규 투자 둔화로 러시아의 석유 생산량은 정체됐다.

노르트스트림1 놓고 미국-서유럽 분열 심화

2003년 미국의 2차 이라크 공격은 임박한 석유 위기에 대한 미국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미국 수급 불균형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가 국가안보를 위협하고 있다는 결론에 따른 것이다(‘질서 없음’). 그러나 2차 이라크 전쟁 후유증은 컸다. 이라크 석유 생산이 전쟁 전 수준으로 회복하는 데 10년 걸렸다. 독일, 프랑스가 이 전쟁에 반대하면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이라크 전쟁과 중국의 에너지 수요 급증, 미국과 서유럽의 분열은 지정학적 안보판을 다시 짜게 했다. 독일은 러시아를 직접 잇는 북유럽 가스관 건설을 추진했다. 노르트스트림1이다. 미국에선 “나토의 사망이나 다름 없다”는 격한 반응이 나왔다. 러시아가 중국의 1차 에너지 공급원이 되면서 양국 관계는 더 가까워졌다. 에너지 수출이 늘어난 러시아는 국제통화기금(IMF)에서 빌린 돈을 갚았다. 미국이 믈라카해협을 통제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고 있던 중국은 페르시아만 석유의 육로 수송 방안을 찾게 된다.

유가 상승에도 ‘자카르타의 유령’을 경험한 산유국들은 증산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석유 생산이 정점에 도달해 하락 국면으로 들어설 것이라는 ‘피크 오일(Peak Oil)’이 불안심리를 자극하면서 시장을 뒤흔들었다. 투기 수요가 유가 상승을 부채질했다는 주장을 놓고 거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투기적 수요가 석유 선물시장에 대거 들어오면서 유가를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미국 의회가 청문회를 여는 등 파장이 컸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유가 상승의 근본 원인은 투기가 아니라 수급 문제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유가는 급등을 거듭해 2009년 7월 WTI가 배럴당 147.27달러를 기록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10개 항공사가 폐업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사우디를 두 번이나 방문해 석유 증산을 요구했다. 국제사회의 잇단 압력으로 사우디는 증산에 나섰으나 불난 석유값을 뒤집지는 못했다. 시장 급변동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더 큰 변동의 폭이 다가오고 있었다. 금융위기, 셰일오일, 러시아 가스 수입을 둘러싼 미국-유럽과 유럽 내부 간 다층적 갈등 심화 등 폭발적 이슈들이 연이어 터져나오면서 세계 에너지 시장은 물론 안보판까지 흔들었다. (④회에 계속)


홍영식 한국핵안보전략포럼 운영위원(전 한국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