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속 캐릭터가 무대 위에서 완벽하게 구현됐다. 배우 이서진이 데뷔 이래 처음으로 연극 무대에 서며 타이틀롤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이서진은 지난 7일 서울 강서구 마곡동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연극 '바냐삼촌'을 통해 관객과 마주하고 있다. 세계적인 극작가 안톤 체호프가 1897년 발표한 동명 희곡을 원작으로, 손상규 연출이 새롭게 해석한 이번 작품에서 이서진은 타이틀롤 바냐를 맡았다. 예능 프로그램의 얼굴로 오랫동안 대중에게 친숙했던 그가 연극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무대를 선택했다는 사실 자체가 공연계 안팎으로 적지 않은 화제를 모았다.
'바냐삼촌'은 평생을 삶의 터전과 가족, 그리고 그 안의 질서를 위해 헌신해 온 바냐와 소냐가 삶 전체가 한순간에 흔들리면서 겪는 갈등과 절망의 순간들을 담아낸 작품이다. 이서진이 바냐, 그의 조카 소냐 역엔 고아성이 캐스팅돼 이목을 집중시켰다.
바냐는 죽은 누이의 남편인 교수 세레브랴코프의 입신양명을 위해 반평생을 바쳤으나, 뒤늦게 그 교수가 무능한 지식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걷잡을 수 없는 좌절과 우울감에 잠식된다. 헌신이 허망함으로 돌아오는 순간, 인간은 어떻게 무너지는가. 체호프는 그 처절한 내면을 한 남자의 이야기에 촘촘히 새겨 넣었다.
이서진의 바냐는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tvN '꽃보다 할배', '삼시세끼' 시리즈와 최근 공개된 넷플릭스 '이서진의 달라달라'까지, 예능에서 그가 구축해 온 특유의 '츤데레' 이미지가 그대로 무대 위에 살아 숨 쉰다. 새침한 듯 정확한 말투, 상대의 허술함을 단번에 꿰뚫는 통찰력, 그러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정이 가는 그 묘한 매력이 캐릭터 위에 고스란히 씌워진 것이다. 관객들이 예능에서 쌓아온 이서진에 대한 호감이 바냐라는 인물과 자연스럽게 포개지면서, 극은 출발선부터 남다른 친밀감을 형성한다.
이 같은 친화력은 바냐의 비호감적인 면모조차 공감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된다. 바냐는 교수가 죽은 누이 사후 재혼한 젊은 아내 엘레나에게 거침없이 "사랑한다", "예쁘다", "좋아한다"고 내뱉는다. 예의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솔직한 감정 표현에 엘레나가 당황할 정도다. 바냐의 또 다른 경쟁자이자 오랜 벗인 의사 아스트로프가 은밀하고 농도 짙은 구애를 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이서진이 예능에서 보여준 직설적인 캐릭터와 완벽하게 맞닿아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서진의 바냐가 단순히 무너진 남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극 안에서 이상한 관계들을 가장 날카롭게 꼬집는 역할도 맡는다.
죽은 아내의 친정에 젊은 재혼 상대를 데리고 와 무위도식하는 교수, 그 교수에게 한없이 굽신거리며 "교수님 말씀은 다 옳다"는 어머니 마리야, 늙은 남편이 "할 말이 있다"며 가족을 집합시키기 불과 1분 전 의사의 구애에 응해 키스하는 엘레나. 이들의 기묘한 행동들에 "이거, 나만 이상해?"라며 되묻는 것이 바냐다. 부조리 속에서 혼자 제정신을 붙들고 있는 듯하지만, 정작 자신 역시 불륜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모순을 이서진은 어색하거나 과장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표현해낸다.
'바냐삼촌' 속 인물들은 오늘을 사는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실수투성이에 우스꽝스러운 순간들이 넘쳐나지만, 바로 옆에 있을 법한 사람들, 겪어봤음직한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이서진의 바냐 역시 마찬가지다. 완전히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닌, 좋아하는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부당함에 분노하며 그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그 찝찝한 인간성이 객석 어딘가의 누군가와 겹친다. 이것이 체호프가 100년이 지나도록 무대에서 살아남는 이유이고, 이서진의 바냐가 설득력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극의 막판, 이루지 못한 사랑과 어긋난 욕망, 뒤늦게 찾아온 후회가 복잡하게 얽히는 절정의 순간에서 이서진의 연기는 한 차원 달라진다. 폭풍처럼 몰아치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그는 흔들리지 않고 극의 중심을 붙들고 간다. 관객과의 즉각적인 호흡, 편집 없는 감정의 흐름, 실수를 지워낼 수 없는 날것의 순간들이 결합되는 연극 무대의 물리적 조건을 이서진은 놀랍도록 안정적으로 통과해낸다.
데뷔 초부터 드라마와 영화를 종횡무진했고, 예능에서 수십 년간 소비되며 대중의 익숙한 얼굴이 됐던 이서진이 연극을 선택한 것은 그 자체가 도전이자 연기자로서 또 하나의 선언이다. '바냐삼촌'은 이서진이 배우로서 얼마나 존재감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무대다. 브라운관의 친근한 츤데레 매력을 입고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숨 쉬는 '인간 바냐'를 완성해 낸 이서진의 열연은 이 연극의 처음과 끝을 완성하는 가장 빛나는 관전 포인트다.
한편 '바냐삼촌'은 오는 31일까지 상연된다.
김소연 한경닷컴 기자 sue123@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