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이 인공지능(AI) 스마트폰 경쟁에서 뜻밖의 암초를 만났다. 아이폰의 차별화 포인트로 내세웠던 '더 똑똑해진 시리'가 제때 구현되지 않으면서 미국에서 대규모 집단소송 합의안까지 마련하게 됐다. 스마트폰 업체들이 AI 기능을 앞다퉈 내세우는 가운데 실제 제품에서 구현되지 않은 기능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게 새로운 리스크로 떠오른 셈이다.
10일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애플은 시리 AI 기능 지연과 관련한 미국 집단소송에서 2억5000만달러(약 3600억원) 규모 합의안에 동의했다. 아직 법원 승인 절차가 남아 있는 데다 애플이 위법 행위를 인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스마트폰 AI 기능 지연이 집단소송으로 이어졌다는 점이 주목 포인트다.
이번 합의안은 대상은 미국에서 일정 기간 아이폰16 시리즈와 아이폰15 프로·프로맥스를 구매한 소비자들로 알려졌다. 소송의 핵심은 애플이 지난해 세계개발자회의(WWDC)와 아이폰16 마케팅 과정에서 애플 인텔리전스와 시리 강화 기능을 대대적으로 알렸지만, 실제 제품 출시 시점에는 일부 핵심 기능이 빠졌다는 주장이다.'맥락 이해하는 시리' 홍보했지만 출시 땐 빠져논란의 중심에 시리가 있다. 애플은 2024년 WWDC에서 애플 인텔리전스를 공개하며 시리가 사용자의 맥락을 이해하고 앱을 넘나들며 더 복잡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메시지, 일정, 사진, 이메일 등 기기 안의 정보를 바탕으로 더 개인화된 답변과 실행을 지원하는 AI 비서를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정작 아이폰16이 출시됐을 때 소비자들이 기대했던 시리 개편 기능 상당수는 제공되지 않았다. 일부 애플 인텔리전스 기능은 이후 순차적으로 추가됐지만, 개인 맥락을 이해하고 앱 간 작업을 수행하는 시리의 핵심 기능은 지연됐다.
이를 놓고 애플 특유의 '완성도 높은 소프트웨어' 이미지와 맞지 않는다는 지적도 나온다. 애플은 하드웨어, 운영체제, 칩, 앱 생태계를 모두 직접 통제한다. 이 때문에 온디바이스 AI 경쟁에서 유리할 것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AI 기능을 실제 사용 가능한 서비스로 내놓는 속도에선 삼성전자와 구글에 밀리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스마트폰 시장에서 AI가 프리미엄폰의 핵심 마케팅 포인트로 떠오른 만큼, 이번 합의안이 주는 의미는 상당하다. 소비자가 제품을 살 때 기대했던 AI 기능이 제때 제공되지 않으면 단순한 업데이트 지연을 넘어 신뢰 문제로 번질 수 있어서다.'되는 기능' 앞세우는 갤럭시애플이 시리 지연 논란에 휩싸인 사이 삼성전자와 구글의 행보도 주목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초 공개한 갤럭시S26 시리즈에서도 갤럭시 AI를 주요 기능으로 내세웠다. 2024년 갤럭시S24 시리즈에서 AI폰을 표방한 이후 S25를 거쳐 S26까지 플래그십 스마트폰의 주요 마케팅 포인트로 AI 기능을 활용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강조하는 기능은 실시간 통역, 텍스트 요약, 이미지 편집, 검색 보조 등이다. 대규모 AI 비서의 미래상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통화, 메시지, 사진, 검색처럼 이용자가 자주 쓰는 기능에 AI를 접목하는 방식이다.
AI 기능을 신제품에만 한정하지 않는 점도 차이로 꼽힌다. 삼성전자는 원 UI 업데이트를 통해 일부 기존 갤럭시 기기에도 AI 기능을 순차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최근 원 UI 8.5 업데이트도 갤럭시S25 시리즈 등 기존 기기로 확대되고 있다. 다만 모델과 지역에 따라 제공 시점과 기능 범위에는 차이가 있다.
AI폰 경쟁이 새 단말 판매 경쟁을 넘어 기존 이용자에게 새 기능을 얼마나 빠르게 제공하느냐의 싸움으로도 번지고 있다는 분석. 애플이 시리 기능 지연으로 신뢰 논란에 놓인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갤럭시S26 시리즈와 원 UI 업데이트를 통해 AI 기능의 적용 범위를 넓히는 흐름이다.
구글도 안드로이드 진영의 AI 확산에 속도를 내고 있다. 구글은 오는 12일 '더 안드로이드 쇼'를 열고 19~20일 Google I/O 2026을 개최한다. 이번 행사에서는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서 AI 기능이 어떻게 달라질지가 주요 관심사로 꼽힌다.
구글의 강점은 안드로이드 플랫폼이다. 구글이 AI 모델 제미나이를 안드로이드에 깊숙이 넣으면, 삼성전자 등 제조사들도 이를 활용해 AI 기능을 더 빠르게 제품에 적용할 수 있다. 애플이 아이폰 안에서 자체 AI 기능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하는 반면 삼성전자와 구글은 안드로이드 생태계 전체로 AI 기능을 넓혀갈 수 있다는 분석이다.6월 WWDC서 AI 신뢰 회복할까애플로서는 다음달 8~12일 열리는 WWDC 2026이 분위기를 바꿀 기회다. 이 자리에서 차세대 iOS와 애플 인텔리전스 관련 추가 기능을 공개할 가능성이 있다. 시리 개편 지연 논란이 불거진 만큼, AI 기능의 완성도와 출시 일정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제시하느냐가 관건이 될 전망이다.
이번 사안이 애플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시각도 있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AI 기능을 프리미엄폰의 핵심 차별화 요소로 내세우는 상황에서, 과장된 마케팅과 실제 사용 경험 사이의 간극은 다른 업체에도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지적이다.
다만 소비자 신뢰 측면에서 이번 사태가 애플에 미칠 타격은 적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홍주 숙명여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소비자 신뢰는 하락할 수밖에 없다"며 "사람들이 믿고 제품을 구매했는데 약속한 기능이 빠지면 단순한 기능 누락이 아니라 브랜드 신뢰를 흔드는 요소"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런 경험이 누적되면 충성도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대로 경쟁사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 교수는 "AI 기능 경쟁이 스마트폰의 핵심 구매 요소가 되면서 소비자들은 '지금 되는 기능'을 중요하게 보기 시작했다"며 "경쟁사가 약속한 AI 기능으로 논란에 휘말린 상황에서, 약속을 잘 지키고 '미래의 AI'보다 '지금 되는 AI'로 설득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 점유율 상승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