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피아노 반주로 버텼는데… 이제는 프랑스에서 예술 축제 열어요"

입력 2026-05-08 17:21
수정 2026-05-08 19:16
올 6월 4~12일 서울에서 열리는 ‘클래시컬 브릿지 국제음악 페스티벌’은 올해 국내에서 열리는 음악제 중 출연자 면면이 가장 화려하다.

1978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자이자 러시아 내셔널 오케스트라 창립자인 미하일 플레트네프, 세계에서 가장 바쁜 첼리스트로 불리는 고티에 카퓌송, LVMH그룹 회장인 베르나르 아르노의 부인으로 알려져 있으면서 프랑스 피아노 음악계를 이끌고 있는 주역인 엘렌 메르시에뿐 아니라 다니엘 로자코비치, 오귀스탕 뒤메이, 사샤 마이스키, 미샤 마이스키, 에드가 모로, 다비드 카두쉬 등 쟁쟁한 연주자들이 한국에 온다.



이 축제는 미국 뉴욕, 프랑스 보르도, 서울 등으로 개최지를 바꿔가며 올해로 6회째를 맞는다. 대륙을 넘나드는 초대형 축제를 기획하고 아티스트를 한데 모은 장본인은 한국인 피아니스트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클라라 민.

뉴욕 콘서트 아티스트 앤드 어소시에이츠(NYCA) 예술감독으로 이 축제를 준비하고자 내한한 그를 서울 서초구의 음악 스튜디오인 세실리아하우스에서 만났다.

슬럼프 때 결심했더니 기회가 왔다

공연은 연주자 혼자 만들 수 없다. 관객뿐 아니라 무대를 조성하는 인력과 홍보가 동원돼야 한다. 프로 연주자에게 연주 실력뿐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는 역량이 중요한 이유다. 클라라 민은 이 역량이 절실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는 대기업 주재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자랐다. 초등학생 때 취미였던 음악이 중학생이 돼서도 끌렸다. 그는 중학생 때 한국으로 돌아와 예원학교에 편입했다. “예술고등학교 기간을 포함한 4년간 집, 학교를 오가며 연습했던 기억밖에 없어요.”

대학은 미국 뉴욕에서 보냈다. 한국인 유학생들과 거리를 두고 현지 적응에 힘썼다. 졸업할 즈음 IMF 외환위기로 가세가 예전만 못하자 그의 어머니는 국내에서 석사 과정을 밟을 것을 제안했다.

“그럼 미래가 음악 학원 선생님으로 제한될 것 같았어요. 다른 가능성을 놔두고 한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았죠. 가서 직접 생활비를 마련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어요. 돈을 벌려고 교회 17곳을 돌며 반주를 맡았죠. 그때 다양한 외국인들과 어울리면서 사람에 대해 많이 배울 수 있었죠.”



자리가 잡힌 클라라 민은 피아노에 하루 15시간씩 매진했지만 슬럼프가 왔다. “같은 곡도 연주마다 달리하고 싶었는데 배우는 대로만 치는 것 같았다”고. 낙담한 그는 뉴욕의 길거리를 정처 없이 걸었다.

“걷고 있었는데 어떤 건물 2층에 ‘야마하’ 사인이 보이는 거예요. 호기심에 들어가 봤더니 넓은 공간이 있고 피아노가 많았어요. 보고서 실내악을 해야겠다 결심했죠. 다른 연주자들과 실내악으로 소통하면서 제 자신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마침 그 건물에 들어온 분에게 얘기했더니 ‘우리도 공연 시리즈를 함께 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자리에서 만난 인물은 야마하의 아티스트 서비스 디렉터인 스탠 지엘린스키였다.

예술을 사랑하는 뉴욕의 기업인들

현장의 야마하 디렉터와 의기투합한 클라라 민은 친구들과 2004년 실내악 공연을 열었다. 소규모일 줄 알았던 공연은 포스터를 만들어 홍보하면서 판이 커졌다. 야마하에서도 나름대로 뉴욕의 음악인들에게 클라라 민의 평판을 조회했다고.

이들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으로 다음 판을 키운다. 오케스트라 수준으로 규모를 늘리자는 야마하의 제의도 있었다. “그런데 해가 바뀌니 지원을 못 해주겠다 하더라고요.”

이미 단원들을 모으고 있던 상황. 클라라 민은 단원들과 줄리어드 음대 인근의 한 교회에서 연습을 계속했다. 누구나 인생에서 세 번은 기회가 찾아온다던가. 한 거부가 음악 소리에 이끌려 교회에 들어왔다.

“연습하는 걸 보고서 그분이 ‘너가 이걸 다 하냐? 연주도 하냐?’ 고 물으시더라고요. 다 한다고 했더니 그분이 깜짝 놀라면서 수표에 2만5000달러(약 3630만원)를 써서 지원해주셨어요.” 귀인의 정체는 교회 옆 건물에 살고 있던 미국-이스라엘 문화재단(AICF)의 의장이었다.



후원의 힘을 체감한 클라라 민은 젊은 음악인들의 생태계에 기여하고자 음악인 교류 단체인 NYCA도 2008년 설립했다. 그러자 다른 귀인도 손을 보탰다. 미국 광섬유·센서 기업 암페놀의 간부인 룩 윌터가 재단 지원을 결정했다. 슈만 오중주 악단을 만들어 뉴욕 음악가들과의 접점을 더 늘리기도 했다. 기획에 자신감이 붙은 클라라 민은 2016년 클래식 음악 기획사인 ICM매니지먼트도 차렸다.

“친구와 적의 비율, 6 대 4면 돼”

기획사 대표이면서 재단 창업자이자 예술감독, 그리고 피아니스트. 어떻게 이 네 가지가 동시에 가능할까. 답은 클라라 민이 존경하는 작곡가인 슈만에게 있다. 이 작곡가는 평론가, 연주자, 기획자였다.

“슈만은 친구들을 엮어주고 도와주는 일을 많이 했어요. 그의 음악에도 따뜻함과 깊이가 있죠. 전 음악가의 미래는 음악가 스스로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업의 마케팅에 의존해선 안 돼요. 음악가가 주도적으로 프로필도, 프로그램도 만들면서 음악의 미래를 만들어야 한단 생각에 저도 슈만처럼 친구들을 모으다가 이렇게 일이 늘어난 거죠.”

미국 사교계의 특수성도 클라라 민에게 개척자 정신을 불어넣었다. “유럽에선 한 연주회를 잘하면 주변에서 반응이 옵니다. 하나의 연주가 나비효과가 돼 또 다른 연주회를 열게 되죠. 그런데 미국에선 뉴욕의 일을 캘리포니아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만큼 미국에선 스스로를 한 군데에 가둬 둬선 안 돼요. 뉴욕에선 자유로우면서 자수성가한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어요. 서로가 ‘잘할 수 있어. 같이 파이를 크게 만들자’하는 게 미국의 분위기 같아요.”



스승이던 피아니스트 바이런 재니스의 가르침도 영향을 미쳤다. 호르비츠의 제자였던 재니스는 “어떤 사람과 어울리는가에 따라 너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친구가 60%, 적이 40%면 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음악가들은 상처를 잘 받는 편인데 너무 외부의 반응에 신경 쓰지 말란 말씀이시죠. 주저 말고 음악인들을 친구라고 생각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나이가 어떻든, 경력이 어떻든 다 친구입니다. 선생님도 먼저 간 선배이자 친구예요. 한국의 음악가들도 경계를 두지 않고 해외로 갔으면 합니다.”

“콩쿠르 밖에도 음악인의 길이 있다”

클라라 민은 많은 한국의 음악인들과는 다른 길을 갔다. 콩쿠르 우승으로 유럽의 연주자들과 협연 기회를 늘리는 방식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저는 슈만 연주로 좋은 평을 받았어요. 21세기에도 슈만의 정신을 따르고 싶었죠. 이런 진심을 보여주면 통하게 됩니다. 음악가는 음악을 사랑하고 서로의 음악을 존중해 주는 게 중요하죠. 커리어는 음악이란 본질을 따르다가 나온 산물이어야지, 그 자체가 목적이 돼선 안 됩니다.”

음악인들을 잇겠단 그의 신념은 클래시컬 브릿지 국제음악 페스티벌이란 축제 이름에 ‘브릿지’가 들어간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음악으로 다양한 문화의 사람들을, 음악인과 대중을 연결하겠단 생각에 2018년 뉴욕에서 처음 연 축제다. 참여한 아티스트들도 이 취지에 공감해 흔쾌히 시간을 내줬다. 클라라 민이 “친구들”이라고 부르는 음악인들이다.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플레트네프도 그가 꾸린 라흐마니노프 인터내셔널 오케스트라와 이번 축제를 통해 한국 관객을 만나기로 했다.



내년부터는 축제 개최지를 프랑스 칸으로 못 박아 두기로 했다. 대신 소규모 축제를 따로 둬서 서울과 같은 다른 도시를 돌 계획이다. 클라라 민은 음악으로 새로운 다리를 또 놓으려 하고 있어서다.

“공연 관람은 그 자체로 소중한 경험을 줍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사적인 모임에서 음악을 접할 수 있죠. 음악, 미식, 비즈니스 미팅 등을 한데 엮는 일도 추진하려 합니다.”

이주현 기자 de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