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마다 흔들리는 반도체…'4년전 데자뷔' [김채연의 재계 인사이드]

입력 2026-05-05 19:00
수정 2026-05-11 16:02

“대구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유치를 추진하겠습니다.”

오는 6·3 지방선거를 앞둔 추경호 국민의힘 대구시장 후보의 공약이다. 경제부총리를 지낸 ‘경제 전문가’조차 표심 앞에서는 예외가 없다. 추 후보는 대구가 울진의 원전과 낙동강을 통해 전력과 용수를 공급받을 수 있는 최적지라고 강조했다.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 후보는 한술 더 떴다. 그는 “취임 1년 내 10조원 규모의 반도체 시설을 유치하겠다”고 가세했다. 이미 경기 용인과 평택을 중심으로 수백조원대 투자를 확정 짓고 ‘속도전’에 사활을 건 기업들의 경영 논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주장들이다.

◇ 4년 전에도 반복된 ‘데자뷔’해외 선진국에서 이 같은 ‘아니면 말고’ 식 공약은 곧 정치적 파산을 의미한다. 영국의 독립 기관인 예산책임처(OBR)는 공약에 투입되는 비용과 경제적 파급효과를 현미경 검증한다. “반도체 공장을 위해 5조원을 쓰겠다”고 선언하려면 그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 공약집에 명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으로부터 “마법의 돈나무(Magic Money Tree)를 흔드느냐”고 조롱받게 된다. 네덜란드는 선거 전 모든 정당이 공약을 국가기관인 경제정책분석국(CPB)에 제출해 타당성을 검증받아야 한다. 기업 유치로 일자리 10만 개를 만들겠다고 해도 CPB 조사 결과 ‘현실적 효과는 5000개’라는 결과가 나오면 유권자들은 그 공약을 신뢰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기업 유치를 위해 전력망 확충, 학교 건립 같은 구체적 방안을 함께 내놓지 특정 기업 이름을 거론하며 공장 입지를 뺏어오겠다는 식의 접근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사실 국내 정치권이 무분별한 공약을 남발하는 풍경은 4년 전에도 등장한 지독한 데자뷔다. 2022년 선거 당시 김진태 강원지사 후보는 “삼성 반도체 유치”를 공약으로 내걸어 원주를 들썩이게 했다. 하지만 4년이 지난 지금, 원주에 들어선 것은 삼성의 생산라인이 아닌 교육원뿐이다. 그런데도 이번 선거에서 김 후보는 다시금 “원주 반도체 클러스터 완성”을 외치며 유권자를 자극하고 있다. ◇ ‘조력자’의 정치를 보고 싶다기업 입장에서 이런 정치권의 행태는 ‘막대한 비용’ 그 자체다. 후보들이 던진 ‘이전설’ 한마디에 기업은 비상이 걸린다. 해외 투자자들이 “입지가 정말 바뀌느냐”고 문의할 때마다 일일이 해명해야 한다. 이는 곧장 주가 리스크로 이어진다. 그렇다고 특정 후보의 주장을 “사실무근”이라고 하면 해당 정당과 척을 지게 되고, 침묵하면 공약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는 꼴이 되는 외통수에 갇힌다. 정치권이 던진 무책임한 공약이 기업에는 고스란히 ‘행정 비용 낭비’라는 숙제로 돌아오는 것이다. 한 반도체 기업 관계자는 “기업이 선거 캠프의 하청업체냐”며 “상의 한마디 없이 공장 유치를 발표할 때마다 쏟아지는 문의에 대응하느라 다른 일을 못 할 지경”이라고 토로했다.

더 치명적인 것은 인력 이탈이다. 반도체는 사람이 전부다. 젊은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지방으로 공장이 갈 수도 있다”는 루머가 도는 순간 조직은 동요한다. 핵심 인재들이 이탈할 경우 기업이 보는 유무형의 손실은 환산조차 어렵다.

이제는 ‘공약의 질’을 검증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지금 글로벌 반도체산업은 개별 기업의 싸움을 넘어선 ‘국가 대항전’이다. 반도체는 1분 1초를 다투는 속도전의 영역이지, 4년 주기 선거판의 볼모가 아니다. 기업이 필요로 하는 것은 확정된 국가 산단이 제때 가동될 수 있도록 전력과 용수 등 인프라 걸림돌을 치워주는 조력자의 역할이다. 정치인이 기업을 전리품으로 여기는 구태를 반복하는 한 한국 반도체의 ‘초격차’는 선거철마다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김채연 산업부 기자 why2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