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대한민국에는 '세상엔 없는 사랑'을 노래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가수가 있었다. 국내 IT 기업 아담소프트가 제작한 한국 최초의 버추얼 가수 '아담'이다. 그의 고향은 에덴(EDEN). 인간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랑하는 여성을 만나기 위해 사이버 세계를 떠나 현실 세계로 발을 디뎠다.
'비현실적' 용모의 아담은 1집 앨범 20만 장 판매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우며 TV 음악 프로그램 출연, 음료 및 패션 광고 모델로 활동하는 등 신드롬을 일으켰다. 당시 IMF 외환위기라는 시대적 아픔 속에서 아담은 새로운 문화기술 산업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희망의 상징으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아담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2집 발매 후 그는 대중의 시야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당시의 불완전한 재현 기술과 막대한 제작 비용이 발목을 잡았다. 30초 분량의 영상을 만들기 위해 수개월의 시간과 수천만 원의 비용이 소요되는 구조에서 수익성을 담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가상현실에 대한 대중의 심리적 거부감 또한 산업의 안착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결국 아담은 가상 인간의 지속 가능성을 증명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2026년, K팝 시장은 다시 한번 가상의 존재들에게 열광하고 있다. 과거의 사이버 가수가 신기술에 대한 호기심에 그쳤다면, 지금의 버추얼 아이돌은 강력한 팬덤을 거느린 산업의 '게임 체인저'로 주목 받고 있다. 변방의 비주류 콘텐츠로 취급받던 이들이 이제는 차트 상위권을 점령하며 주류 문화의 중심으로 진입하는 모양새다. 대중은 왜 다시 가상의 존재에게 지갑을 열기 시작했을까.
한국콘텐츠진흥원 'K-팝 버추얼 아이돌, 음악산업의 새로운 가능성' 보고서에 따르면, 버추얼 아이돌 산업은 2000년대 중반 음성 합성 기술을 시작으로 최근 생성형 AI와 게임 엔진 기술이 발전하며 의미 있는 성과를 내고 있다. 특히 실시간 소통이 가능할 정도의 기술 진보는 가상 세계에 대한 거부감을 낮추고 버추얼 아이돌만의 견고한 팬덤을 형성하는 핵심 동력이 됐다.
기술 완벽함보다 '사람 냄새'…본체 진정성에 반응하는 팬덤
'플레이브'나 '이세계아이돌'의 성공은 과거 아담이 실패했던 지점을 정면으로 돌파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핵심은 역설적이게도 기술적 완벽함이 아닌 '사람 냄새'다. 버추얼 아이돌의 외형은 만화적이지만, 그 목소리와 움직임을 담당하는 '본체' 아티스트들은 실존하는 인간이라는 점에 팬들은 주목한다. 플레이브를 응원하는 오지현(22) 씨는 "무엇보다 팬들을 아끼는 진실한 마음이 느껴지고, 적극적으로 교류하려는 모습에서 깊은 매력을 느낀다"고 전했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과거에는 마니아층의 전유물로 여겨졌으나, 대중의 취향이 세분화된 현재는 하나의 독자적인 장르로 인정받는 추세"라고 짚었다. 이 교수는 "팬들은 기계음이 아닌 실제 가수의 창법과 호흡에 열광하며, 캐릭터 뒤에 숨겨진 인간적인 서사에 깊이 몰입한다"며 "완전한 가상이 아니라 캐릭터를 매개로 실존 인물의 감성과 생동감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강력한 팬덤을 만드는 원동력"이라고 분석했다.
기존 K팝 기획사들이 공을 들이는 '세계관' 구축 측면에서도 가상 가수는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다. 엑소의 초능력 설정이나 엔하이픈의 뱀파이어 서사처럼 실제 인물은 연차가 쌓일수록 현실과의 괴리감으로 인해 세계관 유지에 한계를 느끼지만, 버추얼 아이돌은 캐릭터라는 제약 없는 옷을 입고 있어 훨씬 자유로운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플레이브가 가상 공간 '아스테룸'에 거주한다는 설정 등이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특히 버추얼 아이돌 산업은 단순히 화려한 외형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 커뮤니케이션과 상호작용성, 웰메이드 음악이 종합적으로 갖춰질 때 비로소 경쟁력을 갖는다. 팬들이 인간 아이돌처럼 느낄 수 있는 정서적 교감과 애착의 연결고리가 필수적이다.
군대·노화·사고 없는 '리스크 프리'… 기획사엔 매력적 자산
기획사 입장에서 버추얼 아이돌은 휴먼 리스크를 원천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K팝 산업의 고질적인 고민인 군 입대 문제를 비롯해 노화로 인한 외모 변화, 연애 스캔들, 각종 사건 사고 등 아티스트 개인의 사생활에서 비롯되는 위험 요소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는 장기적인 프로젝트 기획과 투자 회수를 용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다수의 가상 아이돌 연출을 맡은 한 감독은 "가상 아이돌은 데뷔부터 은퇴까지 그룹의 정체성과 서사를 일관되게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최대 장점"이라며 "현재는 밴드 연주와 같은 정교한 동작도 실시간으로 구현할 수 있을 만큼 기술이 고도화되었고, 머지않아 외형을 제외한 모든 활동 면에서 실제 가수와 차이가 없는 수준에 도달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인 K팝 제작 방식에 새로운 도전장을 던지고 있다. 연습생을 발굴해 오랜 기간 트레이닝하는 기존의 공식과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 대형 기획사 관계자는 "버추얼 가수는 가창자의 나이나 과거 경력이 걸림돌이 되지 않고 국적과 장르 선택도 무한하다"며 "리스크 관리가 용이한 가상 그룹의 부상은 수년간 막대한 자본을 투입해 한 팀을 데뷔시키는 기존 기획사들에 상당한 위기감을 주고 있다"고 항변했다.
다만 해결해야 할 숙제도 있다. 고품질 버추얼 아이돌 제작과 운영에는 여전히 막대한 기술적 투자가 수반되어야 하며, 시장 포화에 따른 차별화 전략도 시급하다. 업계에서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버추얼 아이돌을 K팝 산업의 새로운 파이프라인으로 포괄하고, 글로벌 확산과 수출을 위한 정책적 지원을 확대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결국 엔터테크라는 기술적 토대 위에 인문학적 감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다.
김예랑 한경닷컴 기자 yesr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