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흉내 못 낼 촉각 담은 디자인, 새 트렌드 됐다

입력 2026-04-30 17:57
수정 2026-05-01 00:36

지난 24일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Brera) 지구. 거리마다 들어선 브랜드 전시장에 들어가기 위해 관람객이 긴 줄을 늘어섰다. 매년 4월 열리는 세계 최대 디자인 행사인 ‘밀라노 디자인 위크(MDW 2026)’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손끝으로 느껴지는 촉각적 디자인과 시간이 빚어내는 장인정신을 강조한 전시가 유독 많았다. 인공지능(AI)이 0.1초 만에 수백 가지 디자인을 뽑아내는 시대에 디지털의 무결점 대신 ‘의도적인 불완전함’을 내세웠다. 글로벌 기업들이 인간만의 고유 영역을 ‘새로운 럭셔리(New luxury)’로 정의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인간의 고유 영역 ‘촉각’
흔히 디자인이라고 하면 시각적인 것을 주로 떠올린다. 하지만 올해 MDW의 화두는 ‘촉각’이었다. 북유럽 가구 브랜드 ‘무토(Muuto)’는 울퉁불퉁한 굴곡이 느껴지는 소파와 매끈한 세라믹 벽면이 대조를 이루는 쇼룸을 선보였다. 통상 매끄러운 냉장고의 표면에도 요철이 있는 스웨이드 질감을 입혀 ‘만지는 가전’으로 재탄생시켰다. 쇼룸 관계자는 “시각적 자극뿐 아니라 손으로 만지고 느끼며 정서적 안정감까지 얻을 수 있는 디자인”이라고 소개했다. 가구·가전 전시관인 아키프로덕트 밀라노에선 관람객들이 고급 소재 알칸타라(Alcantara)로 제작된 벽과 커튼을 연신 쓰다듬었다. 언뜻 봐서는 매끄러운 느낌이지만, 정교한 요철이 눈으로 볼 때와는 다른 입체감을 자아냈다.


최고급 원단으로 잘 알려진 로로피아나(Loro Piana)도 원단을 캔버스로 활용한 그림들을 전시했다. AI가 생성한 가상의 텍스처가 아닌, 실제로 직조된 실들 사이로 스며든 빛의 음영은 ‘만져 보고 싶은’ 욕구를 자극했다. 캔버스 소재에 따라 광택이 달라져 눈으로 만지는 듯한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했다. 하이엔드 가구 브랜드 비조네는 디자인 스튜디오 NM3와 협업해 재료의 물성을 강조한 가구를 선보였다. 거칠게 쪼갠 천연석, 매트하게 처리한 유리 등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질감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손끝으로 느끼는 장인 정신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인 공예(craft)도 올해 MDW의 주요 키워드였다. 보테가 베네타는 밀라노 산탄드레아 매장에 가죽과 조명을 손으로 엮은 설치 작품 ‘라이트 풀(Lightful)’을 내걸었다. 브랜드의 시그니처 직조 기법인 ‘인트레치아토’를 시각적 조형물로 승화시킨 것이다. 전시에 참여한 이광호 작가는 브랜드의 장인 정신을 작품에 담기 위해 이탈리아 몬테벨로 비첸티노에 있는 보테가 베네타 아틀리에에 머무른 것으로 전해졌다.


에르메스(Hermes)는 석고와 너도밤나무로 쌓아 올린 전시장을 장인의 제품들로 채웠다. 섬유 장인이 수작업으로 직조하고 자수를 놓은 캐시미어 ‘플래드(무릎 담요)’, 세공 장인이 은을 수없이 두드려 만든 화병, 경마장의 곡선을 본떠 의도적으로 휘어지게 디자인한 테이블까지. 관람객들은 각 아이템을 직접 만져 보며 손끝으로 장인 정신을 느꼈다.

AI로 모든 것이 최적화되는 시대일수록 ‘인간다움’에 대한 향수가 짙어질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부 외신은 이번 디자인 위크의 주요 키워드로 ‘스크린 너머(Beyond the screen)’를 제시했다. MDW 2026 관계자는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AI 시대에 시간과 공을 들여 불완전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앞으로 인간의 고유성을 담아낸 제품이 디자인적으로 더 높은 가치를 지닐 것”으로 내다봤다.

밀라노=정소람 기자 ra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