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세기 석유가 뒤흔든 국제 외교·안보 질서① [홍영식의 이슈 워치]

입력 2026-05-03 07:56
수정 2026-05-03 07:57


제1차 세계대전 승리 직후 영국 고위 외교관은 “연합국의 대의가 석유의 파도를 타고 승리를 향해 헤엄쳤다”고 했다. 프랑스 총리는 “석유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주는 전투의 피”라고 했다(하이케 부흐터의 ‘석유전쟁’). 석유는 그 이후 100년 넘게 세계경제는 물론 국제 외교·안보 질서를 규정하는 ‘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그렇고 예측하기 힘든 미래 어느 시점까지 그럴 것이다.

석유와 가스 에너지의 힘은 강력한 결속의 고리인 민족, 이념, 종교를 초월해 제우스에 비견될 만하다. 서유럽은 에너지만큼은 동맹국 미국을 배신하고 ‘악의 제국‘ 소련과 선뜻 손을 잡곤 했다. 서방 국가 간 신냉전이란 말까지 나올 정도다. 이런 기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군사작전을 벌이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석유는 이렇게 80년 동맹도 갈라지게 하고 있다. 이슬람 중동 내부 분쟁의 씨앗이기도 하다. 유가를 좌지우지해왔던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과 러시아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석유 파워를 과시했다.

석유가 국제 외교·안보 판에 의미 있는 요인으로 작용하기 시작한 것은 1차 대전 직전이다. 윈스턴 처칠 당시 영국 해군 장관은 군함 동력을 석탄에서 석유로 바꿨다. 영국 군함은 힘과 속력에서 경쟁국과 비교해 월등하게 앞섰다. 이는 영국이 1차 대전에서 승전하는 하나의 발판이 됐다. 1차 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중동 진출 야망이 컸고 영국과 오스만제국은 중동 석유 쟁취를 위한 전쟁을 벌였다. 영국 측 인도군의 임무는 이란의 아바단 유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1·2차 대전 좌우한 석유 부족 시달린 독일

1차 대전에서 석유는 전황에 큰 영향을 끼친 첫 사례로도 꼽힌다. 군용 차량·대포·항공기·군함·잠수함과 막판 등장한 탱크 등 군 장비는 대량의 휘발류는 물론 윤활유도 필요로 했다. 영국군은 루마니아 유전을 비롯한 독일군 주요 석유 공급처 파괴에 주력하는 전략을 택했다. 반대로 독일 잠수함의 핵심 작전 목표는 영국의 석유 공급줄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영국의 우세였다. 독일은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갈리시아 전투에서 러시아에 패하는 바람에 이곳에서 오는 석유가 끊기면서 벼랑 끝으로 밀렸다(헬렌 톰슨의 ‘질서없음’). 독일군은 심각한 연료 부족으로 군용차와 잠수함, 항공기, 탱크 등 가동을 줄였다. 전쟁 막판 바쿠 유전을 점령해 연료난을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얼마 안 가 항복했다(양수영의 ‘세계에너지 패권전쟁’).

1차 대전 뒤 석유 패권을 잡은 나라는 영국이었다. 전쟁 중 오스만제국을 나눠 갖는 내용의 프랑스와 비밀협정(사이크스-피코)을 맺은 영국은 전쟁이 끝나자 사우디, 이란 등 걸프 지역을 장악했다. 영국은 아랍이 오스만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고 중동 석유 개발권을 확보한 것이다(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배경). 처칠은 “지배는 모험을 무릅쓴 것에 대한 상(賞)”이라고 했다(최지웅의 ‘석유제국의 미래’).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가른 여러 요인 중 하나 역시 석유가 그 중심에 자리했다. 잘 알려져 있듯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원인은 미국의 대(對)일본 석유 금수 조치였다. 진주만에 정박한 미국 해군을 침몰시켜 보르네오 유전 지대 등 태평양 장악에 방해받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 대량의 석유가 필요한 군 장비가 많았지만 독일은 석유가 없었다. 석탄을 액화시킨 합성연료를 제조해 석유를 대체했으나 수요에 턱없이 부족했다. 히틀러의 소련 침공 명분은 이른바 ‘생활공간 확보’이지만 실제론 코카서스 유전 장악이었다(‘질서없음’). 소련군이 퇴각 때 유전에 불을 질러 독일은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 심각한 연료 부족으로 전쟁 막판 군 장비 가동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미·영 항공기들이 독일의 석탄액화 공장을 집중 폭격한 두 달 뒤 독일은 항복했다(‘석유전쟁’).

2차 대전은 미국이 중동에 침을 바르기 시작한 계기가 됐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3년 전쟁에 쓰이는 막대한 양의 석유를 보고 사우디 유전을 보호하는 것은 영국의 일이라고 여긴 생각을 바꿨다. 미국은 사우디와 ‘무기 대여’에 합의했다. 중동 석유 생산 주도권을 두고 영국에 우위를 확보하는 수단이라고 판단한 것이다(‘질서없음’). 전쟁 뒤 영국은 미국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중동 석유 시장에 뛰어들면서 양국이 사이 좋게 개발권을 나눠 가졌다. 사우디는 미국이, 이란은 영국이 차지한 것.

아랍 국가들은 석유를 개발할 자본과 기술력 모두 부족했다. 양국 석유 메이저들이 개발에 나섰고 이익은 해당 국가들과 나눴다. 미국은 석유 수급 안정을 위해 아랍 군주국가들의 보호막 역할도 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중동 국가들이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지고 석유 국유화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변동이 심했다. 특히 이란이 그렇다. 이란 의회는 영국 정부가 지배하고 있던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IOC)로부터 수익의 16%만 받는데 대해 불만을 품고 1951년 강경 민족주의자 모하마드 모사데크를 총리로 선출했다. 모사데크는 팔레비 왕을 2선으로 후퇴시키고 AIOC를 국유화했다. 미국은 소련이 이란을 위성국으로 삼아 석유를 장악할 것을 우려, 영국과 함께 쿠데타를 사주했다. 모스데크는 권좌에서 물러났고 팔레비 왕은 복귀했다.

석유, 나토 분열 촉발…유럽, 미국 중동전략 비토

1950년대부터 석유는 서방세계, 즉 미국과 유럽 간 분열 촉매제로 작용했다. 시작은 수에즈운하 사건이다.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은 1956년 영국이 통제하던 수에즈운하를 국유화했다. 수에즈운하를 통해 하루 120만 배럴의 석유를 공급받던 유럽은 반발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이집트를 공격했다. 2차 중동전쟁이다. 나세르 대통령은 운하 입구에 배를 침몰시켜 통항을 막아버렸다. 당시 미국이 아랍편을 들면서 유럽은 분노했다. 미국은 이 사태로 아랍과 소련이 밀착할 것을 우려해 영국과 프랑스에 철수를 압박한 것이다. 소련도 영국과 프랑스에 핵을 쓸 수 있다고 위협을 가하면서 영국과 프랑스는 물러났다. 미국이 유럽 동맹을 지지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흔들렸다.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미국 동맹에 의존하면 안 된다는 확신을 가졌고 독자 핵개발에 나섰다. 유럽경제공동체 협상도 가속화 됐고 서유럽은 소련 석유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서독은 에너지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소련에 다가갔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사우디는 아람코(당시 이름 Arabian American Oil Company)를 미국 자본으로부터 인수해 국유화했다.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매년 소련 천연가스 30억㎥를 들여오는 파이프 라인 건설을 시작했다. 미국은 서독의 송유관 소련 수출을 막는 등 반발했다. 휴버트 험프리 미국 상원의원은 “소련의 석유 수출이 군사적 위협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다르다넬스 해협 공동 관할권 요구를 받고 있던 튀르키예를 지원한 것도 소련의 중동 석유에 눈독을 들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에너지가 이념과 안보를 뒷전으로 밀어넣는 현상은 지속됐다.(②회에 계속)

홍영식 한국핵안보전략포럼 운영위원(전 한국경제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