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악연에도 막대한 투자를 쏟는 일본과 달리, 역사적 갈등 없는 한국과는 단순 무역 관계에 그치고 있는 게 아쉽습니다."
로스 그레고리 주한호주상공회의소 회장(사진)은 국내 대표적인 지한파 호주인으로 꼽힌다. 호주 맥쿼리증권의 한국지사 최고경영자(CEO) 등을 역임한 그는 한국이 일본만큼 호주와 밀착하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연신 안타까움을 표했다. 호주와 한국은 역사적 걸림돌이 없는 데다, 서로의 산업 구조적 장단점을 완벽히 보완할 수 있는 '천생연분'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는 이번 중동 전쟁으로 양국의 상호보완적 관계가 더욱 명확히 드러났다고 진단했다. 에너지 안보 위기 속에서 한국 내 석유제품 수출 통제 여론이 일자, 호주 정부는 한국 측에 안정적인 공급 유지를 요청한 바 있다. 로스 회장은 호주가 2000년대 들어 저탄소 에너지 전환 정책을 추진하며 정유시설 8곳 중 6곳이 문을 닫았다는 점을 언급하며, "현재 디젤과 항공유 등 석유제품의 30% 가량을 한국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런 관계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생존을 지탱하는 이른바 양방향 도로(2-way street) 파트너십"이라고 말했다. 호주는 한국에 에너지·광물 등 자원을 공급하고 호주는 한국의 정제 기술을 활용하며 실질적인 에너지 안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는 평가다. 실제로 한국은 지난해 기준 액화천연가스(LNG)의 31%를 호주에서 들여오고 있다.
다만 로스 회장은 무역 규모 대비 저조한 상호 투자 수준을 가장 큰 과제로 꼽았다. 그는 "현재 한국의 호주 투자액은 일본에 비해 턱없이 작다"며 "과거 침략이라는 악연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투자를 통해 강력한 파트너십을 구축한 일본과 달리, 역사적 갈등 없는 한국이 여전히 단순 무역 관계에 머물러 있는 점은 안타까운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한국 기업들이 단순한 고객을 넘어 호주 현지 광산과 인프라에 직접 투자하고 지역사회와 협력을 확대하는 파트너로 진화해야 한다"고 했다. 호주는 텅스텐(매장량 2위)과 희토류(생산량 3위) 등 반도체·방산 등 첨단산업에 필요한 핵심 광물의 세계적 공급처다. 최근 안티모니와 희토류의 경제적 매장량(EDR)은 전년 대비 각각 12%, 18%씩 급증하며 투자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자원을 단순히 사고파는 관계에서 벗어나 이들 전략 광물의 현지 미드스트림(중간 가공) 인프라에 선제 투자해 공급망 안보의 실질적 주도권을 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그는 "포스코와 필바라미네랄스가 협력해 호주산 광물을 한국 내 공정으로 연결하는 모델이 대표적인 성공 사례"라고 했다.
특히 배터리 분야는 양국 협력의 교두보가 될 전망이다. 현재 호주 전력망을 지탱하는 배터리 에너지저장장치(BESS) 시장의 90% 이상을 중국 기업이 독점하고 있다. 로스 회장은 "호주 내에서는 '안보 측면에서 중국산 배터리에 대한 의존도를 낮춰야 한다'는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이어 "호주는 2030년 미국과 중국에 이어 세계 3위의 BESS 시장으로 부상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한국 한국 배터리 3사에도 기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소 생태계 구축을 위한 양국의 협력도 강조했다. 로스 회장은 SK E&S와 고려아연 등이 추진 중인 호주 그린수소 프로젝트의 성공을 위해 한국 정부의 청정수소발전의무화제도(CHPS)가 안정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제언했다. 제도의 불확실성이 해소돼야 기업들이 안심하고 최종투자결정(FID)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탄소포집저장(CCS) 협력을 통한 블루수소의 필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블루수소는 탄소 중립으로 가는 과정에서 가장 현실적인 브릿지 기술"이라며 "호주의 풍부한 탄소 저장 지질 구조와 한국의 활용 기술이 결합할 최적의 분야"라고 했다.
이어 "탄소의 국경 간 이동을 위해서는 런던 의정서에 따른 양자 협정 체결이 선행되어야 하지만, 정부 간 협의가 2년 넘게 지연되고 있다"며 "주한호주상공회의소가 양국 정부를 대상으로 해당 협정의 조속한 체결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해외기업 투자 유치를 위한 호주 정부의 파격적인 지원책도 소개했다. 국가재건펀드(NRF)와 수출금융공사(EFA)를 통한 저금리 대출 및 보조금 지원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연방정부와 주정부들이 다양한 정책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며 "뿐만 아니라 연방정부와 주정부별로 다른 인허가 행정 절차를 단일화하는 프론트도어 정책을 통해 규제 문턱을 낮추고 있다"고 했다.
역으로 호주 기업이 한국에 진출할 필요성도 역설했다. 로스 회장은 "호주의 원천 기술 연구개발(R&D) 역량과 한국의 세계적인 제조 스케일업 능력을 결합하면 천생연분이 될 것"이라며 "이를 통해 양국이 글로벌 공급망 주도권을 확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