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1999년 지구 종말을 예언했다. 종말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고대 마야 달력이 끝나는 2012년 등 ‘지구 종말’ 공포는 면면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 일부 사람의 미신적 불안으로 여겨지던 종말론이 이제는 전쟁, 기후재난, 팬데믹, 정치 갈등 등 현실 위기와 맞물리며 관련 시장 성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영화 ‘클로버필드 10번지’와 인기 게임 ‘폴아웃’ 시리즈에서 나오는 지하 벙커를 현실에서 제작하고 준비하려는 이가 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는 ‘프레퍼(prepper)’로 불리는 재난 대비족이 급증하고 있다. 프레퍼는 ‘prep’(준비하다)에 사람을 뜻하는 접미사 ‘er’을 붙여 만든 말이다. 사회 붕괴와 대형 재난에 대비해 식량, 생필품, 무기 등을 미리 비축하는 사람을 뜻한다. 미국에서는 1920년대 말 대공황 무렵부터 독자적 생존을 준비하는 집단이 나타났고,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를 거치며 핵 전쟁 공포가 커지자 이런 흐름이 더 강해졌다.
프레퍼 문화는 대중적 흐름으로 확산하고 있다. 미국 연방재난관리청에 따르면 미국 내 프레퍼 인구는 현재 약 2340만 명에서 최대 7800만 명에 달한다. 미국 전체 인구의 22.3%에 이르는 규모다. 2017년 약 1000만 명이던 것과 비교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영국 주간 이코노미스트는 “코로나19, 기후 위기, 정치 양극화에 이어 최근 이란 전쟁 같은 지정학적 위기까지 겹치며 ‘나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불안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소비 규모도 커지고 있다. 지하 벙커 산업이 대표적이다. 방공호와 낙진 대피소 수요가 늘면서 개인용 지하 벙커를 설치하려는 소비자가 증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중동과 걸프 지역을 중심으로 수요가 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다는 말도 나온다. 일부 지하 벙커 제작 업체는 올해 매출이 네 배까지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미국만의 흐름이 아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부터 독일 베를린의 지하 벙커 제조 업체 BSSD에는 하루 최대 1000통의 문의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
과거 지하 벙커 수요는 초고액 자산가의 별난 취미로 여겨졌다. 마크 저커버그, 톰 크루즈, 빌 게이츠, 샘 올트먼, 킴 카다시안 등이 개인 벙커를 소유했거나 관련 시설을 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제는 일반 가정에도 수요가 확산하고 있다. 글로벌인포메이션에 따르면 지하 벙커 건설 시장 규모가 2030년 418억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지하 벙커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가장 기본형은 2만5000달러(약 3700만원)로 네 명이 1주일가량 버틸 수 있다. 식량 저장고, 물탱크, 정수 시스템, 전력 설비, 무선 통신 장비 등을 추가하면 가격은 수백만달러로 뛴다. 고급형은 일반 주택처럼 거실, 침실, 주방, 욕실, 세탁실은 물론 무기 보관실까지 갖춘 ‘지하 아파트’ 형태로 설계된다.
럭셔리 지하 아파트의 대표 사례는 미국 캔자스주 ‘서바이벌 콘도’다. 버려진 미사일 격납고를 개조한 지하 15층짜리 벙커 아파트로, 162㎡ 규모 한 채 가격이 300만달러(약 44억5000만원)에 달한다. 내부에는 수영장, 헬스장, 영화관, 인공 암벽장, 식량 생산 시설 등이 있다. 75명이 최장 5년간 생활할 수 있도록 설계됐으며 자체 정수·발전 시설과 두꺼운 콘크리트 벽, 무기고를 갖췄다. 고가지만 완공도 되기 전에 완판됐다.
재난 대비 산업이 성장하는 것은 사람들이 미래를 더 불안하게 보고 있다는 신호라는 분석이 나온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위험보다 보이지 않는 잠재적 위험”이라며 “그 두려움이 하나의 산업을 이룰 정도로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눈에 보이는 대비책을 마련하려 한다”며 “앞으로도 재난 유형별로 다양한 상품과 산업이 계속 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련 산업 자체가 일종의 군중 심리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인류가 절멸할 상황이 온다면 독자적 벙커만으로 목숨을 부지하기는 과학적으로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한 전문가는 “부자와 오피니언 리더가 먼저 소비하면 일반 소비자가 따라가는 전형적인 밴드왜건 효과”라고 설명했다.
이혜인 기자 he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