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캔버라 호주국립대(ANU) 캠퍼스엔 40m짜리 타워 하나가 불쑥 솟아 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산업 시설 같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두꺼운 철문과 빽빽한 케이블, 22m 금속 실린더가 시야를 채운다. 호주 유일의 핵물리 실험 가속기인 중이온 가속기 시설(HIAF)이다. 원자를 빛의 속도에 가깝게 가속해 충돌시켜 환경과 우주·의료·양자 산업을 위한 핵심 데이터를 생산하는 국가 차원의 ‘전략적 파운드리’ 역할을 하는 곳이다.
“가속기는 차로 치면 엑셀 페달입니다. 입자를 엄청나게 빠르게 만드는 장치죠.” 지난달 20일 ANU에서 만난 마하난다 다스굽타 HIAF 소장은 시설을 이렇게 비유했다. 타워 안엔 최대 1500만 볼트까지 전압을 끌어올리는 14UD 펠레트론 가속기가 숨겨져 있다. 이 장비가 원소 입자의 속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 엑셀 페달은 단지 물리학을 위한 게 아닙니다. 기후와 우주, 양자, 농업, 암 치료까지 연결돼 있습니다.” HIAF는 호주 정부로부터 국가 연구 인프라(NCRIS)로 지정된 설비다.
이 가속기는 수소부터 플루토늄까지 거의 모든 원소를 빛의 속도에 가까운 속도로 가속한 뒤 다른 물질에 충돌시킨다. 음극·양극을 번갈아 통과시키며 속도를 붙여 이온빔을 만들고 물·토양·부품·암세포·씨앗 같은 다양한 표적에 쏜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미세한 신호를 분석해 물과 토양, 공기, 우주에서 온 입자의 ‘출신 성분’을 구분한다. “한국의 상암 월드컵경기장 전체를 소금으로 가득 채우고, 그 안에 설탕 두 알을 넣었다고 상상해 보세요. 가속기와 계측 시스템을 활용하면 그 두 알을 10~15분 안에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다양한 생활 영역에 기술을 적용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게 지하수, 토양 분석이다. 비가 내려 땅속으로 스며들 때 같이 들어간 방사성 동위원소 농도를 측정하면 지하수가 50년 전 빗물인지, 5만 년 전 빗물인지 ‘나이’를 추정할 수 있다. 오래된 물일수록 재충전 속도가 느리기 때문이다. 어떤 지역에서 어느 정도 속도로 지하수를 퍼올려야 적절한지 정책 판단의 기초 데이터가 된다. 다스굽타 소장은 “국가가 물을 얼마나 오래 쓸 수 있는지에 대한 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농업에도 활용된다. 카놀라·밀 씨앗에 약한 이온빔을 쏴 DNA에 미세한 손상을 준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많은 씨앗 가운데 고온·가뭄·염분에 강한 개체를 골라내는 방식으로 품종을 개발한다. 다스굽타 소장은 “자연 상태에서는 수만 년에 한 번 일어날 돌연변이를 실험실에서 몇 년 만에 압축해서 일으키는 것”이라며 “기후변화로 가뭄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이런 실험은 필수”라고 설명했다. 의학 분야에서는 암세포에 중이온빔을 쏴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는지 주변 정상세포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지 확인할 수 있다. 탄소이온 치료 같은 고가 암치료 기술의 안전성과 효율성을 뒷받침하는 기초 데이터가 여기서 나온다.
HIAF는 호주 연구자들만 쓰는 장비가 아니다. 다스굽타 소장은 “호주 정부의 국가 인프라지만, 해외 연구자에게도 완전히 개방된 시설”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영국 연구팀이 한 빔라인을 쓰고 있고, 싱가포르 연구진도 합류했다. 한국은 대전 RAON, 부산대 이온빔센터 등 각종 가속기 인프라를 구축하는 단계다. 다스굽타 소장은 “물부터 우주, 양자를 동시에 고민하는 점에서 한국과 호주는 문제의식이 비슷하고, 공동 연구와 인력 교류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캔버라(호주)=고은이 기자
※ 이 기사는 한국여성기자협회가 주관하는 '딥테크 관련 호주 R&D 및 정책 현장취재'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