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의 역사 속에서 항상 새로운 식문화가 생겨났다. 호주는 알래스카를 제외한 미국 본토 크기에 버금갈 만큼 큰 대륙이다. 그래서 미 서부 개척만큼이나 호주 대륙의 개척 역사에도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척박한 땅을 일구기 위해 새로운 마을이 생길 때면 항상 술집이 먼저 들어서는 현상이 있었는데, 미서부에는 웨스턴 살룬(West Saloon)이 있었고, 호주에는 호텔 펍이 있었다. 둘 다 마을의 거실처럼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기능적인 역할은 비슷했지만, 웨스턴 살룬이 마초적인 성격이 짙었다면 호텔 펍은 마을 주민들의 사교장 같은 친숙함이 있었다.
"호주 사람들의 진정한 문화를 경험해 보려면 호텔 펍에 가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도 이런 역사에 기인한다. 호주만의 독특한 펍 문화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호텔 펍이 남녀노소 누구나 함께 먹고 마시며 즐기는 경험의 장소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퀸즐랜드의 주도이자 호주 3대 도시인 브리즈번은 브리즈번 강을 끼고 있는 천혜의 도시다. 브리즈번 강의 하류에서 합류되는 브렉퍼스트 하천(Breakfast Creek) 지역은 19세기 말부터 건설 개발 붐이 일었는데, 브렉퍼스트 크릭 호텔(Breakfast Creek Hotel) 건물이 들어선 것도 1889년의 일이다.
호주에서 호텔은 잠자는 숙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며 펍의 개념을 포괄하고 있다. 고단한 하루를 달래주는 시원한 맥주는 물론 다양한 먹거리가 제공된다.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는 장소로서 기능했기에 어쩌면 숙박은 부차적인 서비스에 불과했다. 브렉퍼스트 크릭 호텔은 퀸즐랜드 개척의 역사와 함께 해온 펍이며, 1992년에 퀸즐랜드 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지역민들이 사랑하는 랜드마크가 되었다.
호주는 전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맥주 소비국으로, 펍은 대중적으로 자리 잡은 문화다. 영국 펍 문화에 기반을 두고는 있지만, 실내 공간을 위주로 즐기는 영국 펍과 다른 호주 펍만의 독특한 문화가 있다. 비어 가든 같은 야외 공간이 발달했다는 점이다.
19세기 영국 빅토리안 양식의 영향을 받은 호주의 건축 양식 또한 따뜻한 기후에 어울리는 야외 구조가 발달했다. 베란다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빅토리안 필리그리'(Victorian Filigree) 건축 양식도 호주에서 꽃피운 건축 사조다. 브렉퍼스트 크릭 호텔에도 필리그리 건축 양식이 적용된 만큼, 많은 사람이 베란다와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맥주와 함께 다양한 먹거리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풍경에서 클래식 호텔 펍 문화의 진가를 엿볼 수 있다.
브렉퍼스트 크릭 호텔은 20세기 중반부터 비어 가든 스타일 다이닝을 선보이며 본격적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찾는 사교장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는 손님이 스테이크 고기를 직접 골라서 즐기는 야외 키친도 시작했는데, 이 모든 것들이 브리즈번 최초였다.
1968년부터는 별도의 다이닝 공간에 스패니시 가든 스테이크하우스가 문을 열면서 테이블 서비스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영국 펍 음식 하면 피시 앤 칩스가 독보적이지만, 호주 펍에서는 다양한 음식들이 서빙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스테이크인데, 호주 펍 음식의 자존심이라고 해도 될 만큼 양질의 스테이크를 기대해도 좋다.
스패니시 가든 스테이크하우스 입구에는 드라이에이징 숙성고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스테이크 메뉴에 있는 컷(부위)에 따라 고기를 종류별로 전시한 코너도 있는데, 손님이 주문하고 싶은 스테이크 고기를 직접 고를 수 있는 맞춤형 경험도 제공한다. 모든 고기는 인근 지역에서 생산된 청정우로 채워졌다. 생산자의 구성은 국제적으로 수출 규모가 큰 티스(TEYS)부터 시작해서 호주산 와규로 유명한 달링다운(Darling Downs), 오키(Oakey), 시모(Shimo)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메뉴를 고르는 재미에 깊이를 더한다.
프리미엄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요즘 국내 시장의 흐름에 따라, 최근 한 대형마트에서 티스의 유기농 제품들을 선보인 바 있다. 티스 인증 청정우의 본토 맛은 어떨지 궁금해 티스 앵거스 목초육 포터하우스 스테이크를 시켜보기로 했다. 플레이팅과 프레젠테이션은 다소 투박하지만, 동네 펍 분위기가 물씬 나기 때문에 오히려 정겨웠다.
갓 손질한 양배추의 신선함이 느껴지는 코울슬로, 바삭한 감자튀김, 소스 볼에 담긴 버섯 소스, 포터하우스 덩어리가 모두 함께 접시 위에서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다. 통상적으로 미국에서 포터하우스는 등심과 안심을 포함하는 티본스테이크 기본 부위에서 안심 부위가 더 많은 스테이크를 뜻한다.
하지만 호주에서 포터하우스는 티본 뼈가 없는 스트립로인, 채끝등심 부위를 뜻한다. 뉴욕 스트립, 뉴욕 스테이크로 알려진 담백한 부위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개인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반질거리는 마블링의 부드러운 풍미보다 탄탄한 육질의 식감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프리미엄 부위다.
굽기의 정도를 미디엄 레어로 시켰는데, 작은 꼬치에 굽기 정도를 표시해서 서빙하는 세심함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스테이크 먹는 즐거움 중 가장 기대가 되는 것은 첫 번째 한입을 베어 무는 순간인데, 육즙이 터지거나 질감이 부드러운 것은 아니었다. 질긴 부위의 물컹함도 그대로 씹히고, 기교 있는 시즈닝으로 인한 감칠맛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런데 한입 두입 먹을 때마다 삼삼한 맛이 혀끝에서 맴도는 느낌이 든다. 청정 자연에서 풀을 먹고 자란 고기 본연의 맛에 집중할 수 있다 보니 담백함의 깊이가 느껴졌는데, 마치 심심한 평양냉면에 빠지는 것처럼 여운이 남는 맛이다.
사람들로 붐비던 주말 저녁, 트와일라잇 색채로 물든 브렉퍼스트 크릭 호텔의 활기찬 분위기가 자꾸 떠오른다. 삼삼오오 모여서 시원한 맥주와 함께 스포츠팀 응원을 즐기던 젊은이들, 비어 가든 한편에서 라이브 공연이 시작되니 로맨틱했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 춤추던 노부부들,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피자를 나눠 먹던 삼대 가족의 유쾌한 웃음소리.
이들을 바라보며 청정 호주 스테이크 맛과 함께 경험한 것은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브리즈번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진짜 호주를 경험하려면 호텔 펍에 가봐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