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트 칼럼] 메모리 초격차 이후, 한국 반도체의 다음 시험대

입력 2026-04-17 14:45
수정 2026-04-17 14:59

인공지능(AI)의 확산이 데이터센터의 구조를 바꾸고 있다. 과거 데이터센터가 주로 개별 서버 성능과 범용 중앙처리장치(CPU) 중심이었다면 지금의 AI 클러스터는 수만 개의 그래픽처리장치(GPU)와 고속 네트워크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 방향으로 진화 중이다. 수조 개의 파라미터를 처리하는 AI 모델을 학습시키기 위해 GPU들이 교환하는 데이터의 양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때 연결의 문제는 새로운 병목을 만들어낸다. 실리콘 포토닉스, 전력 손실과 발열 줄인다반도체 업계는 이미 한 번 큰 병목을 경험했다. GPU의 연산 속도를 메모리가 따라가지 못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고대역폭메모리(HBM)은 GPU와 메모리 간의 데이터 대역폭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면서 정체를 해소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 칩과 칩 사이, 서버와 서버 사이에서의 흐름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AI 모델이 커질수록 GPU 간 통신량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그런데 기존 구리 배선을 이용한 데이터 전송은 거리가 길어질수록 에너지 손실이 커지고 발열도 심하다. AI 데이터센터에서 전력과 냉각이 중요해진 이유다.

여기서 주목받는 기술 중 하나가 ‘실리콘 포토닉스(Silicon Photonics)’다. 광학 소자와 전자 회로를 결합해 전기 신호를 빛으로 변환하는 기술로 구리 배선의 한계인 전력 손실과 발열 문제를 줄이면서 압도적인 대역폭을 제공한다.

글로벌 테크 기업들은 이미 상용화 경쟁에 들어갔다. 엔비디아는 AI데이터센터용 네트워크 플랫폼인 ‘Spectrum-X’에 적용하는 포토닉스 스위치를 선보였다. 초대형 GPU 클러스터를 연결하면서 기존 방식 대비 전력 효율은 약 3.5배, 신호 무결성은 60배 이상 개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벨(Marvell)은 세계 최초로 6.4Tbps급 3D 실리콘 포토닉스 엔진을 시연했다. 수백 개의 광학 부품을 하나의 패키지에 통합해 대역폭을 크게 확장하면서도 비트당 비용을 낮추는 데 성공했다. 앞서가는 TSMC, 엔비디아다만 넘어야 할 기술적인 난제도 있다. 가장 널리 쓰이는 인듐인화물(InP) 기반 EML(전기흡수 변조 레이저)은 공정이 복잡해 수율이 상대적으로 낮고 비용 측면에서도 부담이 큰 편이다. 또 AI 데이터센터 수요가 급증하면서 2027년까지 고밀도 광트랜시버의 공급이 제한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동 광학 패키징(CPO, Co-packaged Optics)과 같은 새로운 반도체 구조도 논의되고 있다. CPO는 로직 반도체(ASIC)와 실리콘 포토닉스를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 데이터 전송 거리를 줄이는 기술이다. 칩 내부 발열과 신호 간섭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업체들의 통합 설계 역량이 중요해진다. 실제로 TSMC는 자체 CPO 플랫폼인 ‘COUPE’를 중심으로 다양한 소재 및 부품 파트너들과 협력하며 실리콘 포토닉스 생태계를 확장하고 있다.

실리콘 포토닉스 기술이 생태계 단위의 협업을 요구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경쟁 구도를 재편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아마존,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하이퍼스케일러 기업들이 직접 부품기업들과 협력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국내 광소자 설계 기업이나 패키징 소재 및 장비 기업들이 새로운 기회를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메모리 초격차를 만들어 온 한국 반도체 산업이 시스템 연결과 통합 능력이 경쟁력을 좌우하는 AI시대에도 선두를 지킬 수 있을까.

광학 인프라에 대한 투자는 실제 산업 성과로 이어지기까지 최소 3~5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지금 움직이지 않는다면 다음 세대의 주도권은 다른 곳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이 ‘빛의 연결’이라는 새로운 경쟁의 시험대에 서 있다.

심원섭 부파트너는 맥킨지 한국오피스에서 첨단산업(Advanced Industries) 프랙티스를 공동 리드하며, 한국 및 아시아 지역 성장·마케팅·세일즈(Growth, Marketing & Sales, GMS) 프랙티스 리더도 겸하고 있다. 한국의 반도체, AI, 전기·전자, 로보틱스 등 첨단산업 주요 기업들을 대상으로 성장 전략 수립과 실행을 위한 전사적 트랜스포메이션 프로그램을 이끌어 왔으며, 포트폴리오 및 가격 최적화, 판매채널 고도화, 신사업 전략 등 영업·마케팅 분야 전반의 혁신을 지원하고 있다. IESE 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