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즈니스 포커스]
동국제강그룹이 전기로에 처음 불을 붙인 건 1954년이다. 전후 폐허 속에서 고철을 녹여 철근을 뽑던 전기로는 72년 그룹사의 원점이다. 국내 최초의 현대식 전기로로 철강 보국의 기틀을 닦았던 근간이 현재 시험대에 올랐다.
흔들림의 진원지는 아주스틸이다. 오너 4세 장선익 전무가 주도한 이 인수는 ‘컬러강판 세계 1위’를 겨냥한 베팅이었으나 1년 만에 냉혹한 청구서가 날아들었다.
동국씨엠은 2024년 11월 아주스틸 지분 59%를 약 1200억원에 인수하는 본계약을 체결했다. 가계약 대비 90억원을 낮춘 실리적 확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인수를 기점으로 재무 지표가 악화하고 있다.
현금흐름 74% 급감에 재무 건전성 비상
순차입금은 약 8300억원으로 불었고 순차입금 비율은 80%에 육박한다. 아주스틸의 기존 단기 차입 승계분과 인수 금융이 합산된 결과로, 전년 별도 기준 대비 차입 규모가 60% 이상 급증하며 재무 부담을 키웠다.
현금 창출 능력을 나타내는 기초체력도 급격히 약화했다. 2025년 동국씨엠의 연매출은 1조9736억원으로 전년 대비 8.8% 감소했으며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모두 적자로 돌아섰다. 특히 잉여현금흐름(FCF)은 839억원으로 전년(3279억원) 대비 74.4% 급감했다. 인수 대금 지급과 차입금 승계 등 투자 활동에 따른 현금 유출이 맞물린 결과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동국제강그룹은 현재 오너 3세 장세주 회장과 장세욱 부회장의 형제 경영 체제로 운영된다. 장선익 전무는 장세주 회장의 아들이자 장세욱 부회장의 조카다. 아주스틸 인수를 주도한 건 장 전무지만 컬러강판 사업 자체는 사실상 장 부회장이 키워온 영역이다.
그는 컬러강판 브랜드 ‘럭스틸(LUXTEEL)’을 시장에 안착시키고 세계 최초 무용제형 컬러강판을 개발했다. 매출 2조원, 생산 100만 톤을 목표로 한 ‘DK 2030 컬러 비전’도 그의 작품이다.
지난 4월 9일에는 아주스틸이 채무 상환을 위해 모기업 동국씨엠으로부터 180억원을 긴급 차입했다. 이자율 4.60%. 계열사 수혈에 의존하는 구조가 됐다.
본업의 성적표는 더 냉혹하다. 봉형강 사업을 담당하는 신설법인 동국제강의 2025년 영업이익은 594억원. 영업이익률 1.9%다. 인적 분할 직후인 2023년 하반기 단 7개월 만에 영업이익률 9.0%, 영업이익 2355억원을 찍었던 기세가 2년 만에 꺾였다. 7개월 치 이익의 4분의 1을 12개월 꼬박 조업해서 겨우 건진 셈이다.
내실은 더 나쁘다. 2025년 별도 기준 당기순이익은 82억원으로 매출액 대비 순이익률은 0.2%를 기록했다. 3조원대 매출을 올리고 모든 비용을 제하면 수중에 남는 돈이 사실상 전무하다.
IB 업계 관계자는 “이 정도 순이익 규모로는 사내 유보금 적립은커녕 자산 상각이나 금융비용 변동성조차 감당하기 버겁다”고 말한다.
이자보상배율은 위험 수준에 근접 중이다. 건설 경기 침체로 봉형강 부문의 이익 방어 기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추가적인 금리 변동이나 원가 상승 등 외부 변수가 추가될 경우 적자전환 가능성까지 열어둬야 하는 상황이다.
사옥의 귀환, 명예와 실리의 충돌
동국제강그룹의 을지로 사옥 ‘페럼타워’ 재매입은 이 시점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면이다. 2015년 유동성 위기 때 4200억원에 삼성생명에 넘겼던 건물을 지난해 7월 6450억원에 되찾았다. 10년 만에 50% 넘는 웃돈이다.
그룹은 “10년 구조 개편의 마침표”라 자평했지만 정작 시장 시선은 차가웠다. 주식시장에서 평가받는 동국제강의 몸값이 사옥 매입가(6450억원)를 밑돌고 있어서다. 3조원대 매출에 순이익 82억원인 회사가 그 80배에 달하는 사옥 취득비를 지출한 셈이다.
아주스틸 인수 후유증으로 외부 차입이 불가피한 시점에 평당 3800만원짜리 공간에 거액을 묶어두는 선택이 최선이었냐는 의구심이 시장 안팎에서 나왔다.
‘철강만 해서는 망한다’…72년 조업 공식도 파괴
장세욱 부회장은 올해 주총에서 철강 본업을 넘어선 사업 다각화의 의지를 재확인하며 필사의 수습에 나섰다. 특별수출본부를 신설해 아프리카 신흥국으로 영업 인력을 급파했다. 미국 관세 장벽과 국내 건설 경기 침체를 정면 돌파하기 어렵다면 경쟁 축 자체를 바꾸겠다는 전략이다.
야간 조업 언급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의 예를 봤을 때 앞으로 전기로는 전기료가 저렴한 야간에만 가동해야 한다.” 그의 발언은 원가 절감 선언이 아니다.
동국제강은 철근 수요 감소와 건설 경기 침체 장기화에 대응하기 위해 2023년 7월 인천공장에서 처음으로 야간 조업을 시범 도입했다. 2024년 6월부터는 상시 야간 조업 체제로 전환, 생산을 약 35~40% 수준으로 감산 중이다. 에너지 효율이 생존을 결정하는 구조로 바뀌었다는 현실 인식이다. 그간 고수해온 전통적 조업 방식을 넘어, 에너지 효율 중심의 새로운 생존 방정식으로 전환한다는 상징적 발언이다.
이번 주총에서 정순욱 동국홀딩스 전략실장이 지주사 사내이사로 신규 선임됐다. 그룹 전반의 전략과 재무 현안을 총괄하는 정 실장의 이사회 합류는 아주스틸 인수 이후 불거진 재무 리스크를 지주사 차원에서 진화하겠다는 포석이다.
AI 접목 등 기술혁신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동국씨엠은 업계 최초로 AI 기반 결함 검출 기술 ‘DK SDD’를 개발했다. 세계 최초로 양면형 태양광발전 효율을 극대화하는 초고반사 컬러강판 ‘솔라셀(Solar cell PCM)’도 출시했다. 빛 총반사율 85%를 구현한 이 제품은 친환경 건자재 시장 선점을 겨냥한 전략이다.
포항 데이터센터로 시총 저평가 탈출
탈철강의 최종 그림은 포항에서 윤곽을 드러낸다. 유휴 부지와 이미 구축된 대규모 수전(受電) 설비를 AI 데이터센터 인프라로 전환하겠다는 구상이다.
데이터센터의 생명선은 안정적 대용량 전력이다. 포항 제강소는 전력 계통 접근성이 뛰어나고 기존 변전 설비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어 신규 부지 대비 구축 비용을 낮출 수 있다.
동국홀딩스는 AI 에듀테크 기업 엘리스그룹에 전략적 투자도 단행했다. 소프트웨어 역량 확보와 동시에 초대형 데이터센터의 초고하중을 견디는 특수 강재 ‘디-메가빔(D-MEGABEAM)’을 출시했다.
쇳물 냄새 가득했던 노후 부지가 AI 데이터센터의 근간으로 탈바꿈하는, 이른바 ‘업의 본질’을 바꾸는 승부수다. 자회사 동국인베스트먼트(CVC)를 통한 소부장 기업 투자도 같은 맥락이다.
철강 너머 AI 인프라로 체질 개선 총력
증권업계는 철근 가격 상승과 봉강 스프레드 개선 기대감으로 올해 1분기 실적 반등 가능성도 점치는 분위기다. 업계 관계자는 “아주스틸과 사옥 매입으로 입은 재무적 내상을 신사업 수익성으로 얼마나 빨리 메우느냐가 재무 개선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포항 데이터센터 구상이 실질 매출로 연결되기까지는 물리적 시간이 필요하다. 아프리카 시장이 재무적 기여로 돌아오기까지는 그보다 더 긴 호흡이 요구될 전망이다. 결국 이 과도기를 어떻게 버텨내느냐가 동국제강과 동국씨엠이 직면한 생존 과제인 셈이다.
현재 동국제강의 시가총액은 5100억원대다. 시장은 아직 신사업의 미래 가치보다 당장의 재무 리스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냉혹한 평가를 뒤집고 ‘자산 재평가’를 끌어내는 것이 장세욱 부회장 앞에 놓인 숙제다.
안옥희 기자 ahnoh0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