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대'가 사라진 시대

입력 2026-04-15 17:39
수정 2026-04-16 00:06
한 사회가 무너질 때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은 성장도, 일자리도 아니다. 바로 ‘기대’다. 요즘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단어는 위기도, 정체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기대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지난 2월 15일 나온 한국직업능력연구원 보고서는 ‘그냥 쉬었음’ 현상이 20대 초반을 넘어 후반까지 확산되는 ‘우상향 전이’를 보여준다. 취업이라는 경로가 더 이상 미래를 바꿀 것이라는 확신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청년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교사는 학생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가르치는 일보다 민원과 분쟁 대응이 더 중요해진 환경에서 기대는 교육의 출발점이 아니라 위험 요인이 됐다.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 기대가 작동하지 않는 구조 속에서 기다림은 더 이상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며, 장기적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서 사교육은 사실상 유일한 선택이 된다. 국민도 정치에 기대하지 않는다. 정책은 반복되지만 일관성은 유지되지 않고 장기적 약속은 쉽게 수정되고 폐기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기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대가 작동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이다. 기대를 만들어내려는 정책은 외부에서 기대를 주입하는 방식이다. 이에 비해 기대가 작동하는 정책은 노력과 선택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 규정함으로써 기대가 스스로 형성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금의 정책은 기대를 직접 만들어내려고 한다. 청년 지원금, 고용 및 주거비 보조 등은 과거 정부에서도 반복된 접근법이다. 이들 정책은 보조금을 통해 결과를 보완한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지만, 구조 자체를 바꾸지 못한다.

기대가 작동하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선 다음이 필요하다. 첫째, ‘선택’이 실제로 가능한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한국 사회에서 형식적으로 선택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특정 경로로 수렴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의대와 법대 쏠림이다. 개인에게는 합리적일 수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특정 경로 쏠림이 강화된다. 오히려 법조인과 의료인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점차 약화되고 있다. 선택이 하나로 좁혀지는 사회에서는 기대 역시 형성될 수 없다.

둘째,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기대는 선택 이전에 예측의 문제다. 한국 사회는 부동산 정책 등이 정권에 따라 반복적으로 바뀌는 걸 숱하게 경험했다. 시장 참여자들이 장기적 기대를 형성하기 어렵다. 이재명 정부가 부동산 및 자본시장에서 일관된 기조를 유지하는 것은 예측 가능성 측면에서 긍정적이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관세 정책과 중동 관련 군사적 긴장 속에서 정책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그 결과 동맹국과 핵심 지지 기반인 ‘마가(MAGA) 세력’까지 등을 돌리고 있다. 이는 정책 내용보다 방향의 예측 가능성이 기대를 좌우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셋째, 결과가 ‘공정’하게 만들어지는 시스템을 설계해야 한다. 기대는 결과의 크기가 아니라 그 결과가 공정하게 산출됐다는 믿음에서 형성된다. 절차적 공정성 이론에 따르면 사람들은 결과보다 과정의 일관성과 공정성을 더 중시한다. 청년 세대에게 공정은 단순한 가치가 아니라 자신의 선택과 노력이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기준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예외 없이 적용될 때에만 노력과 결과의 연결이 회복되고, 그때 비로소 기대는 다시 작동한다.

기대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동하는 구조 속에서 형성된다. 오는 6월 3일 지방선거는 지방정부를 선택하는 장이다. 각 후보의 공약이 단순히 기대를 만들어내는지, 아니면 기대가 작동하는 구조를 설계하는 것인지 주권자들이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