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권진규 배출한 '전설의 화실'…80년 만에 되살아났다

입력 2026-04-14 14:54
수정 2026-04-14 14:55


서울 돈암동 458-1. 지금은 숙박업소가 서 있는 이 자리에 80년 전 ‘성북회화연구소’라는 문패를 단 화실이 있었다. 젊은 시절의 ‘물방울 화가’ 김창열(1929~2021), 근현대 조각의 선구자 권진규(1922~1973), 추상화 선구자 남관(1911~1990)이 한 자리에 모여 그림을 그렸다. 그 중심에 화실을 연 한국 근대미술 거장 이쾌대(1913~1965)가 있었다.

1945년 해방 직후 한국 미술계는 정치판이었다. 작가들은 좌우로 나뉘어 정치색을 띤 기념전과 모금전에 앞다퉈 참여했다. 그림의 주제도, 전시 이유도 정치가 결정했다. 하지만 성북회화연구소에 모인 작가들은 정치 대신 미술에만 집중했다. 이념이 어떻든, 미술사조가 어떻든 예술을 사랑하는 작가라면 누구나 연구소에서 실력을 갈고닦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족적은 그대로 한국 현대 미술사가 됐다.

이쾌대, 성북회화연구소를 열다

서울 성북동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1946, 성북회화연구소’는 그 시절 연구소에 몸담았던 작가들의 발자취를 조명하는 자리다. 연구소 출신의 현대미술 주요 예술가 30여명 가운데 12명의 작품과 관련 기록을 모았다. 지난달 개막한 이 전시는 국내 미술 관계자들 사이에서 올 상반기 최고의 전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렇게 존재감 있는 전시가 구립미술관 규모에서 가능했던 건 성북구립미술관의 특수성 때문이다. 성북구립미술관은 2009년 전국 최초의 ‘구립’ 공립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성북구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해방기까지 화가와 조각가들이 밀집해 살았던 한국 근현대미술의 중심지. 이쾌대가 보문동에 살았고, 권진규의 아틀리에(동선동)는 지금도 등록문화재로 남아 있다. 미술관은 이런 자산을 바탕으로 성북 연고 작가들을 꾸준히 연구해왔다. 지역 밀착형 연구에서는 웬만한 국립미술관 못지않은 전문성을 쌓아온 셈이다.

이번 전시는 2024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본전시 출품작이었던 이쾌대의 1940년대 작품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으로 시작된다. 자화상에는 두루마기와 붓, 중절모와 팔레트 등 동서양의 요소가 뒤섞여 있다. 서양 문물과 전통이 교차하던 혼란기의 상황을 담은 한국 근대미술의 상징적 걸작이다.



연구소는 대작을 그리기 위해 넓은 공간을 찾던 이쾌대가 건물을 빌리면서 시작됐다. 전시에 나온 가로 162cm, 세로 128cm의 대작 ‘군상II’가 그 흔적이다. 그림 그릴 장소가 필요했던 화가, 그림을 배우려는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하나둘씩 모여들면서 이곳은 일종의 작업실 겸 교습소가 됐다.

이쾌대를 비롯한 남관, 이인성, 이봉상, 이규상, 이해성, 백영수 등 중견 화가 7인이 강사로 참여해 하루 3회(오전·오후·야간) 석고상·인체·정물 데생을 지도했다. 전시 1부에서 이쾌대에게 그림을 배운 조덕환의 인체 드로잉, 강사로 일했던 남관의 작품 등을 만날 수 있다.

성북회화연구소는 1948년 명륜동으로 이사했고, 1950년 이름을 바꿔 명맥을 지속하다가 6·25 전쟁 발발로 문을 닫았다. 이후 이쾌대의 삶은 기구했다. 6·25때 북한군에 의해 김일성과 스탈린의 초상화를 그리는 부역에 동원됐고, 이 때문에 서울 수복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감됐다.

1953년 포로 교환 때 그는 북한행을 선택했다. 부역 전력이 있고 형이 이미 월북해 대한민국에서의 정상적인 삶이 어렵다고 판단해서다. 하지만 그의 형은 1958년 숙청됐고, 이쾌대도 1965년 위장질환으로 사망해 수십년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살아남은 현대미술의 씨앗들

이쾌대의 삶은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씨앗들은 꽃을 피웠다. 이쾌대의 제자인 김창열이 대표적이다. 훗날 ‘물방울 그림’으로 한국 현대미술 대표주자가 된 그는 이쾌대에 대해 “그에게 성실과 끈기를 배웠다”고 회고했다. 50년 간 물방울 하나만 그린 김창열의 집요함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전시에는 그의 대표작인 ‘물방울’(1983)을 비롯해 초기작 ‘판자집’ 등이 나와 있다.





연구소에서 데생을 배운 권진규는 일본 무사시노미술학교에 입학 후 조각으로 전향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이룩했다. 이 밖에도 석조조각의 대가 전뢰진, 섬유예술가 정정희, 화가 심죽자 등이 한국 현대미술사에 이름을 새겼다. 전시 2부와 3부에서 이들의 작품을 골고루 만날 수 있다. 전시는 5월 24일까지, 관람은 무료.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