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자동차업계에서 가장 자주 거론된 단어는 ‘전기자동차 캐즘(대중화 전 일시적 수요 정체)’이었다. 5년 전만 해도 조만간 전기차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었지만, 실제 전환 속도는 예상보다 더뎠다. 일부 전문가는 전기차 캐즘이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는 비관론도 내놨다. 하지만 올해 들어 분위기가 조금씩 바뀌고 있다. 글로벌 자동차 트렌드를 선도하는 시장 중 하나인 한국에서 소비자들이 전기차로 눈길을 돌리고 있어서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전기차 보조금 지원을 유지하고 있고, 국내외 전기차 브랜드가 전기차 판매에 힘을 싣고 있다”며 “이런 상황에서 유가 고공행진이 이어지자 전기차 수요가 늘었다”고 분석했다.
◇잘나가는 전기차…月 4만 대 시대 열어12일 한국자동차모빌리티산업협회(KAMA)에 따르면 지난달 국내 신규 등록 전기차는 4만1918대로 집계됐다. 국내 전기차 월간 판매량은 2022년 9월 처음으로 2만 대를 넘었고, 3년5개월이 지난 2월에서야 3만 대를 돌파했다. 하지만 4만 대 벽을 넘는 데는 그로부터 한 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지난달 등록된 신규 차량 가운데 전기차가 차지한 비율은 26.0%로 휘발유 차량(30.2%)과 4.2%포인트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지난해 3월만 해도 전기차 비중은 12.2%로 휘발유차(38.5%)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현재 추세가 이어지면 연간 전기차 판매량은 사상 최초로 30만 대를 넘어설 가능성이 거론된다. 지난해 전기차 판매량은 22만177대였다.
올해 들어 전기차 수요가 급증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지급하는 구매보조금도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기후에너지환경부 등에 따르면 이날 기준 전국 지자체 전기차 보조금 지급 공고 대수(9만2173건) 대비 접수율은 77.5%(7만1409대)였다. 전기차 보조금을 지급한 지 약 3개월 만에 정부가 계획한 보급 대수 기준 4분의 3이 소진됐다는 뜻이다. 정부와 국회는 지난 10일 2026년도 1회 추가경정예산안을 처리하면서 전기차 구매 보조금 예산을 1500억원 증액했다. 전기 승용·화물차 총 3만 대를 추가로 지원할 수 있는 규모다. ◇글로벌 車 시장에서도 전기차 강세국내 전기차 판매량이 급증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정부가 올해 초부터 보조금을 지급한 게 주효했다는 평가다. 정부는 보통 3월을 전후해 전기차 보조금 지침을 공개했는데, 올해는 지난 1월 13일에 발표했다. 전기차를 사길 원하는 소비자들이 연초부터 구매를 할 수 있게 됐다.
미국 전기차 업체 테슬라가 지난해 말 차량 가격을 내리고, 중국 업체인 비야디(BYD)가 중저가 시장을 적극적으로 공략한 영향도 있다. 여기에 중동 사태를 계기로 유가가 고공행진을 이어간 것도 전기차 구매 심리를 자극한 것으로 풀이된다.
업계에서는 당분간 전기차 인기가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고유가가 계속되는 가운데 주요 전기차 업체들이 잇달아 신차를 내놓고 있다. 테슬라는 3일 국내에서 ‘모델 Y L’의 사전 예약을 받기 시작했다. BYD와 지리자동차의 전기차 브랜드 ‘지커’도 국내에서 전기차 라인업 확대를 준비 중이다. 현대자동차·기아는 아이오닉과 EV 시리즈, PV5 등 목적기반차량을 중심으로 전기차 판매량을 끌어 올리겠다는 방침이다. 다만 전기차는 충전 과정에서의 불편함이 여전히 있고 보조금을 받지 못하면 가격이 내연기관차에 비해 비싸기 때문에 판매량 증가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글로벌 시장에서도 전기차 등록량이 다시 증가하고 있다. 지난 2월 유럽연합(EU)에 등록된 전기차는 15만8280대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동기보다 2만7005대 증가한 수치다. 중국은 신에너지차 비율이 올해 50% 이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정상원/김우섭 기자 top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