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 작품 중 딱 한점 남긴다면 미디어 샌드위치"

입력 2026-04-09 17:17
수정 2026-04-10 02:26
“백남준 에스테이트(유산 관리 재단)에 있는 작품 중 딱 한 점만 가질 수 있다면, 저는 이 작품을 선택하겠습니다.”

백남준(1932~2006)의 장조카이자 유산 관리자인 하쿠다 겐(75)은 지난 1일 ‘미디어 샌드위치’(1961~1964)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소개된 이 작품은 한국과 일본의 레코드판 8장과 독일 전자공학 잡지 8권, 19세기 인쇄물 하나를 나란히 배치한 백남준의 초기작이다. 레코드판(소리)과 잡지(전자 기술), 인쇄물(시각 이미지)을 결합한 이 작품을 통해 백남준은 미디어아트라는 장르의 서막을 올렸다.

백남준의 20주기 회고전 ‘백남준: 되감기/되풀이(Rewind/Repeat)’가 서울 용산 아모레퍼시픽 1층 전시공간 ‘APMA’에서 열리고 있다. 세계 최대 화랑 가고시안과 백남준 에스테이트가 함께 마련한 전시다. 백남준 에스테이트 큐레이터이자 생전 동료였던 존 호프먼이 기획을 맡았는데, 에스테이트와 공식 협업한 전시가 국내에서 열린 건 25년 만이다.

백남준의 핵심 희귀작들을 한눈에 돌아볼 수 있는 밀도 높은 전시다. 출품작 11점 가운데 10점은 국내 최초 공개작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 브라’(1969). 투명 비닐 브래지어에 소형 흑백 텔레비전 두 대를 내장한 구조로, 당대 유명 첼리스트 샬럿 무어만이 뉴욕 하워드와이즈갤러리의 퍼포먼스에서 처음 착용했다. 무어만이 활을 그을 때 발생하는 소리가 TV 화면의 이미지를 실시간으로 변화시킨다. 하쿠다는 “기계를 차갑고 기능적인 도구로 보기보다 인간의 몸과 감정, 행위에 직접 연결시키기를 원했다”고 말했다. 컬러TV조차 찾아보기 어렵던 50여 년 전에 백남준은 일종의 웨어러블 스마트 기기를 상상한 셈이다. 하쿠다는 “이 작품을 발표할 때 나는 열다섯이었는데, 샬럿이 저한테 이걸 입고 벗는 걸 도와달라고 했더니 삼촌이 ‘어떻게 애한테 그런 일을 시키냐’며 화낸 기억이 있다”며 웃었다.

‘런던과 해외를 위하여(우편함)’(1982)는 영국식 우편함 안에 TV를 넣은 작품이다. 편지 투입구에 해당하는 구멍으로 화면이 보인다. 우편함은 원래 먼 곳의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장치다. 백남준은 그 안에 TV를 집어넣어 편지 대신 전파로 소통하는 시대를 형상화했다. 1982년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비디오 아트 전시의 출품작이기도 하다. 딱 세 점만 지금까지 남아 있다.

‘골드 TV 부처’(2005)는 백남준의 대표 연작 ‘TV 부처’ 시리즈의 후기작으로 ‘셀카’ 시대에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현대인의 모습과 묘하게 겹친다. 이번 전시 기획의 중심에 있는 하쿠다는 백남준 큰형 백남일의 장남이다. 사업가이던 그는 자식이 없던 백남준이 세상을 떠난 뒤 작품 관리를 맡았다. 하쿠다는 “작고 후 호프먼 큐레이터와 둘이서 방대한 아카이브를 정리하는 데만 거의 10년이 걸렸다”고 했다. 전시는 오는 5월 16일까지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