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은 남아있어도 그 그림이 놓였던 맥락은 쉽게 잊히곤 한다. 작가가 왜 그렸는지, 당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전시장에서 어떤 작품과 나란히 걸렸는지는 작품만 봐서 알기 어렵다. 이런 정보를 알려주는 게 신문기사 스크랩이나 전시 팸플릿, 도록 같은 사료(史料)들이다.
이 귀중한 사료들을 평생에 걸쳐 모은 사람이 국내 최초의 미술 전문 기자인 이구열(1932~2020)이다. 1959년부터 약 15년간 미술현장을 취재했고, 기자직을 그만둔 뒤인 1975년에는 ‘한국근대미술연구소’를 열어 개화기 이후의 미술 관련 문헌과 자료를 직접 수집·정리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이구열은 화가와 그들의 지인을 찾아 화단의 비화를 캐고 사라져가는 근현대미술의 흔적을 좇았다. 고희동·박수근·천경자 등과 직접 교류했고, 나혜석을 발굴·재조명한 게 그다. 그렇게 40여 년 동안 모은 자료가 4만여 건. 기사 원고, 스크랩북, 사진, 편지, 전시 도록, 작가 기록 카드까지 한국 근현대미술의 관계망과 흐름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이구열은 자신이 모은 자료를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했다. 삼성문화재단은 1999년 이를 포함한 근현대작가 160여 명의 기증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미술기록보존소’를 설립했다. 국내 최초의 미술 전문 아카이브다. 이는 2024년 총 8만5000여 건 규모의 ‘리움 아카이브’로 확대 구축됐다.
오는 10일부터 6월 14일까지 서울 한남동 리움미술관에서 열리는 ‘아카이브 이후: 이구열의 기록들’은 이 사료들을 주제로 한 첫 연구 프로그램이자 전시다. 이구열 기증 자료를 대중에게 공개하는 첫 자리이기도 하다.
프로그램은 전시와 포럼으로 나뉜다. 리움미술관 강당 라운지에서 6월 14일까지 열리는 전시는 약 160점의 미술 기록을 선별해 쇼케이스 형식으로 구성했다. 전시장 벽면과 선반에는 그의 생애와 한국 근현대미술의 흐름이 펼쳐지고, 중앙에는 기증 이후 자료의 분류 체계와 아카이빙 과정이 소개된다. 이구열의 저작을 열람하는 공간과 인터뷰 영상도 마련했다.
4월 10~11일 양일간 진행되는 연구 포럼에서는 이구열의 기록과 컬렉션을 출발점으로 한국 근현대미술 연구에서 아카이브의 역할을 논의할 예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 아르코예술기록원, 백남준아트센터 등 국내 주요 기관의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미술사학연구회와 공동으로 학술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구정연 리움미술관 교육연구실장은 “이러한 기록은 한국 미술사의 공백을 메우면서 아직 쓰이지 않은 서사의 가능성을 여는 출발점”이라고 했다. 관람료는 무료. 프로그램 상세 일정은 리움미술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