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가 26조원 규모 ‘전쟁 추가경정예산안’ 가운데 편성 취지에 어긋난다고 직접적으로 지적한 사업 규모만 45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동 사태 장기화에 따른 민생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추경을 긴급 편성했다는 정부 설명이 무색하다는 평가가 나온다.◇자원 비축과 맞먹는 ‘시급성 미달’ 사업8일 한국경제신문이 국회 10개 상임위원회의 ‘2026년도 제1회 추경 예비심사 검토보고서’를 전수조사한 결과 추경 편성 요건 여섯 가지 중 하나인 ‘시급성’을 충족하지 못한 사업 규모가 4491억8500만원으로 집계됐다.
국가재정법상 추경을 편성하려면 다음 해 본예산 편성까지 기다릴 수 없는 시간적 급박함이 인정돼야 한다. 특히 이번 추경은 중동 전쟁에 따른 민생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역대 최단기간 내 편성될 만큼 시급함을 강조한 예산안이다. 그러나 국회는 예비심사 보고서를 통해 다수 사업이 “시급성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수요 증가를 이유로 전기차 구매 때 보조금을 지급하는 ‘전기차 보급 사업’에 900억원을 편성했다. 이에 대해 소관 상임위인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는 “최근 3개월간 신차 계약 증가를 유가 상승에 따른 긴급한 수요 확대라고 보기 어렵다”며 “해당 사업은 고유가 위기 대응이라기보다 2026년 본예산 편성 당시 축소된 예산 소진 우려에 따른 증액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 밖에도 기후부는 신재생에너지 설비 설치(623억8000만원), 에너지저장장치(ESS) 확대(588억원), 탄소 포집·활용(CCU) 기술 개발(224억500만원) 등을 추경 예산에 반영했다. 산자위가 “추경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한 기후부 사업 규모만 2355억8500만원에 달한다. 중동 전쟁으로 피해를 본 공급망을 안정화하기 위해 편성한 석유 비축 확대 예산(2000억원)보다 많다.◇연구용역을 추경으로 하겠다는 국토부다른 부처도 상황은 비슷하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중소기업모태펀드 출자에 추경 예산 1700억원을 편성했다. 하지만 중기부는 지난해 9월 편성된 2차 추경에서 펀드 출자금 3000억원을 배정받았다. 이 펀드는 회계연도를 넘긴 올해 1월에야 결성됐고, 3월 기준 투자 실적은 20억원으로 결성총액(6451억원)의 0.3%에 불과했다. 산자위는 “다음 연도 예산을 기다릴 수 없는 시급성, 해당 연도 내 집행할 수 있는 연내 집행 가능성을 모두 충족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국토교통부는 교통난 해소를 위한 정책 연구용역 예산으로 10억원을 배정받았다. 국토교통위원회는 “추경 편성 후 용역을 수행할 경우 일정이 촉박해 질적 수준을 확보하기 어려워 (내년으로) 이월될 우려가 있다”며 “시급성과 긴급성을 이유로 추경을 편성한 취지에 반한다”고 지적했다.
전날 민생경제협의체 회의에서 언급된 소위 ‘중국인 짐 나르기 사업’도 대표적인 시급성 미충족 사업이다. 추경과 무관한 사업이라는 지적에 이 사업은 삭감됐지만 ‘중국 관광 홍보 마케팅’ 사업 예산 281억원은 살아남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국회가 지역구 사업 등 소위 ‘쪽지예산’을 끼워 넣고 있어 추경 규모가 30조원까지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남정민 기자 peux@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