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행료 1조 물고서라도 원유 들여와야"…정유사 임원의 비명[김보형의 뷰파인더]

입력 2026-04-13 08:33
수정 2026-04-13 14:27


“이란에 척당 200만 달러(약 30억원)의 호르무즈해협 통행료를 물고서라도 원유를 들여오는 게 낫습니다.”

국내 정유 4사의 한 생산 담당 임원은 최근 “호르무즈가 막히면 4월 말부터는 정유 설비 가동을 중단해야 할 판”이라며 이처럼 말했다. SK에너지·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 등 정유 4사가 호르무즈에 연 350척의 원유운반선(약 7억 배럴)을 투입하는 것을 감안하면 이란에 부담해야 할 비용만 연 7억 달러(약 1조500억원)에 달한다. 그런데도 이 임원은 “정유 공장은 가동을 중단하는 데 한 달이 걸리고 멈춘 공장을 재가동하려면 또다시 두 달이 필요하다”며 “3개월간 공장 불을 끄는 것보다는 이란에 통행세를 내는 게 낫다”고 했다.
한국 산업 불 꺼질 판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 여파로 취약한 에너지 공급망 문제가 다시 부각됐다. 한국은 원유 도입의 약 70%, 석유화학 원료인 나프타는 약 50%, 액화천연가스(LNG)도 약 20%를 중동에서 들여온다. 사우디아라비아(32.2%), 아랍에미리트(UAE·13.7%), 이라크(9.4%), 쿠웨이트(7.8%) 등 주요 수입국들이 호르무즈해협 안쪽에 있어 봉쇄 시 타격이 불가피하다. 호르무즈해협 봉쇄가 1개월 지속될 경우 국내 한 달 사용량에 육박하는 8000만 배럴의 원유 도입이 차질을 빚는다.

휘발유와 경유 등 수송용뿐만 아니라 ‘산업의 쌀’로 불리는 나프타도 원유 정제 과정에서 나오는 석유화학 기초원료다. 에틸렌과 플로필렌 관련 제품 원료인 나프타가 없으면 플라스틱, 합성섬유, 합성고무, 비닐 등의 수급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나프타 고갈로 조만간 비닐 공급이 끊길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돌면서 후진국에서나 볼 법한 쓰레기종량제 봉투 사재기 현상까지 발생했다.

에너지 공급망 붕괴는 핵심 수출 산업인 반도체와 자동차는 물론 내수 경기를 떠받치는 건설업까지 영향을 미친다. 반도체 핵심 공정에 쓰이는 헬륨은 사실상 공급이 끊겼다. 카타르가 전 세계 헬륨 생산 능력의 약 35%를 차지하는데 이란의 공격으로 헬륨 생산 시설이 있는 라스라판 산업단지가 피해를 입으면서다. 자동차도 플라스틱 내·외장재와 타이어 생산 원가 압박이 커지는 가운데 물류비와 에너지 비용 상승까지 겹치면서 수익성 악화가 우려된다. 파장은 농업, 건설업으로도 번질 수 있다. 질소비료를 만드는 데 필요한 천연가스 확보가 어려워지면 비료를 충분히 쓰지 못한다. 비료가 부족하면 수확량이 줄어들어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 상승)이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석유화학 기반 건축자재 가격 급등도 아파트 분양가 상승, 주택 공급 위축을 불러온다.

다행히 미국과 이란이 전쟁 39일째인 4월 7일 2주간의 휴전에 사실상 합의하면서 셧다운 사태는 피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란이 호르무즈해협 개방을 조건으로 미국이 공격을 중단하기로 한 만큼 중동산 원유·나프타 수입도 재개될 가능성이 높다.
애꿎은 정유사 때리기만
원자력발전소 가동률 상향과 태양광, 풍력 등 재생에너지 확대로 부족분을 메울 수 있는 전력과 달리 수송용 원유는 뾰족한 대책이 없다. 매일 100만 배럴가량의 원유를 정제해온 한 정유사 관계자는 “200만 배럴을 운송할 수 있는 대형 원유운반선이 이틀에 한 번꼴로 정유 공장에 원유를 공급해야 하지만 이란 전쟁이 발발한 3월 초부터는 공급이 끊겼다”고 했다.

그럼에도 정부는 원유 부족 사태 해법을 가격에서 찾았다. 차량 5부제 등 수요 억제책 대신 3월 13일부터 ‘석유 최고가격제’를 도입해 기름값 상승을 눌렀다. 석유 최고가격제는 국제유가 급등 시 정부가 석유 판매 가격의 상한선을 지정하는 제도다. 오일쇼크가 발생한 1970년 제정된 석유사업법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실제 시행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어 23일에는 ‘유가 담합’ 혐의를 이유로 4대 정유사에 대한 압수수색까지 벌이면서 정유사를 압박했다. 석유 최고가격제를 통해 L당 2500원을 웃돌아야 하는 기름값을 L당 2000원으로 억눌렀다.

가격을 통해 수요를 조절하는 시장 원리를 무시한 석유 최고가격제는 휘발유와 경유 수요를 억누르기는커녕 도로 위의 차들만 늘어나게 했다. 화물차 같은 사업용 차량뿐만 아니라 대중교통으로 전환이 가능한 자가용 차량까지 혜택을 받는 점도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든다.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에 따른 정유사 손실도 세금으로 메워야 한다. 정부는 3월 31일 발표한 ‘중동전쟁 위기 극복을 위한 2026년 추가경정예산안’에서 정유사 손실 보전 등에 5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전체 추경 예산 26조2000억원의 19%로 단일 항목 기준으로 가장 크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는 서민들이 자가용을 굴리는 중산층 기름값을 지원하는 꼴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원유 확보 노력부터
산업계를 중심으로 ‘5월 위기설’이 커지자 정부는 비축유를 정유사에 먼저 빌려주는 ‘비축유 스와프’ 제도를 도입했다. 비축유 스와프는 정유사가 해외에서 원유를 구매했다는 사실을 증명하면 한국석유공사가 비축유를 먼저 공급하고 이후 정유사가 원유가 도착하면 같은 물량으로 상환하는 방식이다. 미국과 아프리카 등에서 들여오는 대체 원유가 국내에 도착하기까지 약 50일이 걸리는 만큼 그에 따른 수급 공백을 메우겠다는 취지지만 정유업계에서는 실효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란 전쟁 장기화로 5월 인도분 국제유가가 치솟아 정유사들의 도입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5월 인도분 아랍 라이트(경질유) 공식판매가격(OSP) 프리미엄이 배럴당 40달러 수준으로 전망된다. 배럴당 120달러 안팎인 두바이유 가격에 프리미엄(40달러)까지 붙으면 도입가격은 160달러에 달한다. 정유업계 일각에선 “팔수록 손해를 보는 구조”라는 볼멘소리도 들린다. 정유 4사의 한 재무 담당 임원은 “도입 가격이 비싼 것도 문제지만 추후 국제유가가 떨어질 경우 정유사 손실이 커질 수밖에 없다”며 “‘유가 헤지(위험 회피)’ 등 변동성을 줄일 수 있는 정부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미국의 한시적 제재 완화 조치로 공해상에 떠 있는 러시아산 원유·나프타 도입이 가능해졌지만 금융 결제 문제와 세컨더리 보이콧(제3자 제재) 등 리스크도 적지 않다.

업계에서는 석유화학제품 매점매석 금지, 수급 조정 명령 등 국내 규제만 강화할 게 아니라 대체 원유를 확보하는 일부터 서둘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도 호르무즈해협 이외의 대체 경로를 통해 4월 5000만 배럴, 5월 6000만 배럴의 원유를 확보했다고 밝혔다. 평시도입량(8000만 배럴)의 60~70% 수준으로 아직은 부족하다. 늦었지만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이 특사 자격으로 카자흐스탄과 사우디, 오만을 방문한 점도 다행스럽다.

이란 전쟁이 끝나더라도 에너지 시설 피해 복구 등으로 내년 4분기까지 국제유가가 배럴당 90달러(대외경제연구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이 적지 않다. 전쟁 이전(배럴당 63달러)보다 40% 이상 오른 수준이다. 내년 말까지 고유가를 견뎌야 한다는 얘기다.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이 ‘광화문 전광판에 불을 끄는 식’의 절약만으로 에너지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2030년 재생에너지 비중 20%’, ‘모든 동력원 전기화’처럼 미래의 거창한 구호 대신 당장 원유·나프타 등 에너지 공급망 안정화 전략부터 수립해야 할 시점이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